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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술공주의 그리움이 사무친 치술령
2020년 02월 28일 (금) 23:44:35 김규순 서울풍수아카데미 원장 www.locationart.co.kr

 

망부석에서 보이는 태화강과 울산 그리고 동해

묵장산(781m)은 울주와 경주의 경계에 서 있으며, 상당히 가파르게 형성되어 있다. 낙동정맥의 백운산(892m)에서 호미지맥으로 분기되는데 천마산-묵장산으로 이어졌다. 천마산과 묵장산이 연결된 능선은 형산강과 태화강을 나누는 분수령이다. 묵장산은 남쪽으로는 국수봉과 옥녀봉으로 분기하고 북쪽으로는 경주 남산으로 북동쪽으로는 경주 토함산을 솟구치게 하고 나아가 구룡포까지 밀고 올라간 역량을 지니고 있다. 묵장산의 서쪽은 대곡천이, 남쪽은 태화강이 흐르고 있는데, 천전리 각석과 반구대 암각화를 품고 있으며, 치술공주의 망부석과 치술령 넘어 은을암이 동해를 바라보고 있는 곳이다.

치술공주, 박제상, 눌지왕의 삼각관계

 

치산서원 울주군 두동면에 있는 박제상의 유적지. 치산서원과 박제상기념관이 있다. 이곳은 실상 박제상과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 박제상이 왜로 갔을 때 치술공주가 유배된 곳으로 전해지는 곳으로 치술공주가 사랑하는 남편을 그리워하며 살았던 장소이다. 치산서원도 치술공주에서 따온 이름으로 이곳은 치술공주가 주인공이다.

치술공주와 박제상의 사랑에는 눌지왕이라는 훼방꾼이 있었다. 눌지왕은 실성왕의 딸 아로부인 김씨를 왕비로 맞이하였지만, 왕비의 동생 치술공주가 아름다워 탐이 났다. 그녀를 둘째 왕비로 삼을 수는 없을까 밤낮으로 고민하였다. 신라시대에는 자매가 한 남자와 결혼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김유신의 누이 보희와 문희도 나란히 김춘추의 부인이 되었듯. 그러나 치술공주는 박혁거세의 후손인 삽량주건(현 양산시장) 박제상과 결혼하여 딸 청아와 삼아를 낳고 알콩달콩 재미있게 살고 있었다. 치술공주는 실성왕의 공주였고 박제상은 박혁거세의 후손으로 제5대 파사왕의 5세손이었다. 그야말로 눌지왕에게 박제상은 눈엣가시였다.

치술공주와 박제상의 러브스토리가 비극적인 결말을 갖는 데는 그 역사가 길다. 먼저 성골로 짜여진 신라왕족의 족보를 캐보아야 한다. 신라에서는 성골만이 왕이 될 수 있는 골품제를 유지하고 있었기에 성골을 유지하기 위해 근친혼이 다반사였다. 내물왕은 미추왕의 동생 김말구의 아들이었고 미추왕의 딸 보반부인과 결혼했다. 사촌끼리 결혼한 것이었다.

이 당시 신라는 국력이 약해서 고구려에 볼모를 보내야 할 처지였다. 제17대 내물왕은 사촌동생인 실성왕을 고구려로 볼모를 보내어 내실을 기하고자 하였다. 내물왕이 죽자 왕위를 물려받은 제18대 실성왕도 고구려와 왜나라에 볼모를 보내야 했는데, 내물왕이 그랬던 것처럼 사촌동생인 복호는 고구려로, 미사흔은 왜로 볼모를 보냈다. 이에 제19대 눌지왕은 자기 동생들을 볼모로 보낸데 앙심을 품고 사촌형인 실성왕을 죽이고 왕위를 찬탈했다.

치술공주의 그리움이 사무친 치술령 이미지 1

 

눌지왕의 계략

 

망부석 치술공주가 눌지왕과의 사이에서 딸을 낳고서도, 사랑하는 님을 잊지 못해 산에 올라 몸이 굳어 바위가 된 망부석이다. 망부석은 사랑하는 님을 사지에 보낸 눌지왕에 대한 저항의 표시이다.

눌지왕은 왕이 되었지만 볼모로 끌려간 두 동생을 귀국시킬 방도가 없었다. 고민 끝에 눌지왕은 벌모말, 구리내, 파로 등 세 사람의 측근을 불러 상의한 끝에 충성스러우면서도 우직한 박제상을 동생을 구해오는 터미네이터로 임명하였다. 눌지왕은 다른 계산이 마음속에 자리하고 있었다. 박제상이 동생을 구해오면 다행이고, 구해오지 못하면 돌아오지 못할 것이다. 돌아오지 못하면 그가 마음속으로 사모하던 치술공주를 취할 수 있을 것이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방법이었다. 이러한 음모를 알지 못한 박제상은 충성스럽게도 복호를 고구려에서 탈출시켜 성공리에 귀국한다. 이에 눌지왕은 동생이 생환한 기쁨도 잠시, 박제상의 얼굴을 보자 치술공주가 떠오른다. 그는 전광석화처럼 계책을 떠올렸다. 왜에 머물고 있는 미사흔을 생각하면서 눈물을 흘렸던 것이다. “그대의 공은 내가 잊지 않을 것이요. 내 동생 복호를 데리고 왔으니 무엇이라 치하할 수 있겠소. 정말로 고맙소. 그래도 기쁨보다 슬픔이 더 크오. 왜에 잡혀있는 미사흔의 생각에 미쳐버릴 것 같소. 어떡하면 좋겠소?” “임금께서는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지금 바로 달려가서 왕자를 모셔 오겠습니다.” “정말이요! 공은 나의 은인이요. 지금 바로 제상공에게 배와 사공을 내어드리겠소.”

반구대암각화 탁본“자- 떠나자 고래 잡으러~.” 이 고래가 저 고래는 아니지만, 어쨌든 고래의 고장은 울주이다. 울주 대곡리에 고래가 드려진 반구대 암각화가 있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고래잡이 유적이다. 신석기 시대 기원전 7,000년 해수면이 높아져 반구대에서 멀지 않은 곳 까지 바닷물이 들어 온 것으로 보인다. 반구대 암각화는 세계최초의 고래이야기로 예술작품이며, 기록이다. 울산시립박물관 소장.

치술공주는 이 소식을 듣고 율포(지금의 울산)으로 뛰어갔으나 박제상의 배는 이미 출발하고 있었다. 아련히 떠나는 사랑하는 님, 애처롭게 부르며 울부짖었지만, 님을 실은 배는 속절없이 멀어져가기만 했다. “임금이 그렇게 중하나, 사랑하는 사람을 두고 떠나가다니 무정한 사람아!”

반구대 암각화(국보 제285호)태풍 차바의 영향으로 암각화가 물에 잠겼다. 울주군에서 키워드는 치술공주와 반구대암각화이다. 반구대의 핵심은 고래잡이이다. 긴수염고래, 향유고래, 혹등고래, 귀신고래 외에 작살 맞은 고래 등 50여 마리가 새겨져 있다. 그리고 그 당시에 선단을 형성하여 고래잡이를 한 것으로 그려져 있어서 신석기시대 사람들의 고래잡이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세계적으로도 유일한 암각화이다. 암각화를 새긴 주인공은 호모사피엔스이다. 지금 우리와 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 인류이며, 한민족 문명의 기원을 연 우리의 조상이다.

박제상의 죽음, 치술공주의 슬픔

 

신모사(神母祠)치산서원에서는 충신 박제상 외에도 신모(神母)도 모셔 놓았다. 여신을 모신 서원은 아마 여기 밖에 없을 것이다. 신모(神母)는 치술신모를 가리키며, 치술령의 산신령이다. 치술공주가 있었기에 박제상이 역사에 기록되어 전한다고 생각한다. 이곳에서 치술공주가 빠지면 앙꼬 없는 찐빵이 된다.

눌지왕은 박제상과 약속한대로 미사흔과 치술공주를 묵장산 아래에 유배를 보냈다. 그리고 ‘박제상이 미사흔과 짜고 역모를 꾸미고 눌지왕을 몰아내려다 실패하고 왜로 도망을 쳤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미추왕 때 왜의 사신을 불태워 죽인 일이 있고나서 왜와 신라는 적국이 되어있었기에 서로가 불신하고 있었다. 왜인들은 이같은 정보를 듣고 박제상을 믿기 시작했다. 그리고 박제상을 이용하여 신라를 정복할 계획을 세우려고 했다. 박제상은 왜인들의 감시가 느슨해진 틈을 타서 탈출을 단행했다. 미사흔이 배를 타고 탈출할 시간을 벌기 위해 자기는 남아서 거짓 정보를 흘렸다. 결국 발각이 나서 잡혔고, 왜왕은 왜의 사신이 신라에서 불태워 죽었던 것처럼 박제상을 불에 태워 죽였다. 치술공주는 매일 밤낮을 유배마을 뒷산(치술령)에 올라 기도를 드렸다. 미사흔이 돌아왔는데도 박제상은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몇 달 후 박제상이 죽었다는 소식이 들어왔다.

은을암(隱乙岩)치술공주의 몸은 바위가 되었지만, 혼(魂)은 새가 되어 암벽의 작은 동굴에 숨어서 님을 기다렸다는 눈물겨운 이야기가 전해온다. 새가 숨었던 바위라고 해서 은을암이다.

눌지왕은 충신이 죽었다는 소식에 치술공주를 위로하는 자리를 마련하였다. 사랑하는 이를 잃은 슬픔에 젖은 치술공주가 더 더욱 아름다워 보였다. 주위를 물린 눌지왕은 치술공주를 겁탈하였고 궁궐을 나가지 못하게 하였다. 그 당시 과부를 취하는 것은 아무런 죄가 되지 않았다. 치술공주는 육촌오빠인 눌지왕이 자기를 차지하기 위해 박제상을 사지로 몰아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만 어찌할 수 없었다. 눌지왕이 아무리 애를 써도 님을 향한 그리움은 더욱 간절해졌다. 눌지왕과의 사이에서 낳은 젖먹이가 있어서 죽지도 못했다. 신라 성골의 세계에서는 지금과 같은 불륜의 개념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권력투쟁에서는 혈육도 없었다. 여성도 남성도 여러 명과 상대해도 후손만 많이 낳으면 상관이 없었다. 성골의 숫자가 줄어들고 있었기 때문에 왕족들은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던 시기이기도 했다. 성골들은 자기만의 세계를 구축하기 위해 형제끼리 사촌끼리 또는 조카와 결혼하곤 했다.

망부석에서 내려다 보이는 치술공주 유배지

아버지를 죽이고 남편까지 사지로 보내 죽인 불공대천의 원수 같은 눌지왕은 지금 지아비로 행세하고 있다. 어느 날 치술공주는 세 딸과 십수 년 만에 님을 기다렸던 그 산에 올랐다. 님이 불에 타 죽은 바다 건너 왜를 쳐다보면서 그리움에 사무쳐 울다가 지쳐 쓰러지니 치술공주의 몸이 굳어지기 시작했다. 이내 그녀의 몸은 바위로 변하였고, 그녀의 혼은 새(鳥)로 환생하여 근처 바위굴에 숨었다. 사람들은 치술공주의 죽음에 함께 슬퍼하며, 그 산을 치술령이라 불렀고, 그 바위에는 망부석(望夫石)이라고 새겼다. 그리고 혼이 새로 환생하여 숨은 곳을 은을암이라고 했다.

치술공주의 러브스토리와 풍수는 무슨 관계인가?

 

은을암(隱乙庵)치술공주의 넋을 기리고자 암벽 앞에 세운 지은 암자.

치술령은 울산 앞바다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전망이 좋은 곳이다. 배를 타고 오는 님을 기다리기에는 안성맞춤인 자리이다. 눌지왕은 연적(戀敵·박제상)을 사지에 몰아넣어 죽이고, 육촌동생을 겁탈한 것이다. 눌지왕에게 복수하기 위해 치술공주는 억겁의 세월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바위가 되어 자기의 사랑을 표현했으며 증거를 남겼고, 산신령(치술신모)가 되어 바람에 사연을 실어 퍼뜨렸다. 이 이야기는 삼국사기에, 삼국유사에, 화랑세기에 기록되어 만대에 전하게 되었다. 많은 등산객들이 치술령과 망부석을 찾아 1,500년 전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고, 은을암(隱乙岩) 앞에는 은을암(隱乙庵)이 지어져 그녀의 넋을 기리고 있다. 비극적인 러브스토리의 명당이 바로 여기이다.

이예 동상 울산문화예술회관 뒷마당에 세워져 있는 이예 동상. 이예는 조선시대 초(세종 조)에 활발하게 활동한 외교관으로 그 당시에 일본에 40여 차례나 다녀왔으며, 납치당한 조선 백성들을 구했다. 울주는 일본과 왕래가 잦은 곳으로 역사가 깊다. 염포(울산)에는 왜관이 설치되어 있었고, 임진왜란 때에 왜군들이 쌓은 울산왜성, 울주 서생포왜성도 남아있다. 왜인들의 출입이 잦은 것은 일본에서 배를 타고 해류를 따라오면 울산에 닿기 때문일 것이다.

망부석은 ‘왕의 동생이라 할지라도 내님보다 귀중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강변하기에 이보다 더 좋은 자리가 어디에 있겠는가. 만년이 지나도 이 러브스토리를 간직할 곳은 여기밖에 없을 것이다. 최상의 풍수는 풍수사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간절함 속에 숨어 있는 것임을 이제야 알겠네.

※본 내용은 [삼국사기], [삼국유사], [화랑세기]의 내용을 스토리텔링으로 각색한 것입니다.

태화강 선바위 이곳 지질조사에서 수천 년 전 바다였다는 증거가 나왔다. 지금은 반구대가 산속이지만, 그 부근까지 바닷물이 들어갔을 것으로 추정되며, 고래를 바닷가 만 깊숙이 몰아서 사냥했을 것으로 보인다. 태화강의 고수부지에서 태풍이 지나간 흔적이 보인다.

 
글·사진 김규순(서울풍수아카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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