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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고지신의 도시 안동과 안동김씨
2020년 02월 17일 (월) 09:21:55 김규순 서울풍수아카데미 원장 www.locationart.co.kr

 

 

안동과 낙동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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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청각(강 건너에서 본 임청각)

고성이씨 이증(李增)이 영산현감을 마치고 장인을 만나러 왔다가 안동의 산수에 매료되어 정착하여 입향조가 되었다. 임청각은 이증의 아들 이명이 1519년 지은 고성이씨 종택이다. 임청각의 주인 석주 이상룡은 조선말에 임청각에서 많은 독립운동가들을 배출했으므로 일제는 고성이씨 가문의 정기를 말살하기 위해서 철도건설을 감행한다. 고의적으로 철도의 노선을 임청각을 지나가도록 설계하여 임청각 전체를 없애버리려 했으나 안동사람들의 격렬한 반대로 행랑채와 문루만 사라졌다. 그러나 그들은 풍수를 이해하지 못했다. 집을 부순다고 정기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제 중앙선 철도의 직선화가 추진되어 안동역이 안동시내의 서쪽 송현동으로 이전하므로2018년에는 임청각 앞의 철도가 철거된다. 그러면 임청각도 복원되리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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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자정 안에 걸린 독립운동가들의 사진

임청각의 군자정

안동은 낙동강을 중심으로 발달한 지형이다. 함백산(1,572m) 북쪽 금대봉(1,410m) 아래의 너덜샘에서 발원한 낙동강 본류는 태백산(1,566m)의 물과 합쳐져 백두대간의 준봉사이를 지나 안동댐으로 흘러들어오고, 영양의 일월산(1,217m)에서 발원한 반변천과 청송 주왕산(722m)에서 발원한 용전천은 임하댐으로 들어가며, 보현산(1,126m)에서 발원한 길안천도 남쪽에서 북쪽으로 흘러 안동에서 낙동강을 만난다. 낙동강이 북에서 남으로 흐른다고 하지만, 낙동정맥의 서쪽 사면에서 발원한 물들이 안동을 중심으로 하여 흘러드는 까닭에 안동지역의 낙동강은 동에서 서로 흐르는 특징을 보인다. 낙동강 유역에서 낮은 구릉과 평지가 골고루 발달하여 사람이 살기에 알맞은 곳이다. 특히 풍산, 풍천, 일직구역은 논밭이 넓게 형성된 지형이라 생리(生利) 즉 먹거리 생산이 풍부하여 유서 깊은 마을들이 많이 포진하고 있다. 구릉과 평지가 조화롭게 발달하여 사람이 살기에 아름다운 곳에는 천안과 안성과 같이 편안할 안(安)자를 쓴다.

조상의 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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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정사 극락전

국보 15호, 안동시 서후면 태장리 901번지에 있음.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 고려시대(12세기경)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봉정사 극락전이 천년의 새월을 견디며 전해져 오고 있다. 천년의 새월 동안 태풍과 화재 그리고 전쟁을 견디며 무사했다는 것 자체만으로 범상치 않은 곳이라는 증거이다. 극락전은 옆면이 특히 아름답다. 672년 의상대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6.25전쟁 때 관련 자료가 모두 소실되어 정황을 알 수 없지만 신라시대 건물양식일 수도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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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정사 대웅전

 

국보 311호, 조선시대 초기의 다포계 공포양식의 팔작지붕 건물. 학이 나르는 듯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안동은 대한민국에서 매우 색다른 도시이다. 지리적으로나 역사적으로 그리고 정서적으로 선비정신이 투철한 도시로 온고지신(溫故知新)의 정신이 강하여 조상의 것을 보존하고 섬기는 고장이다. 그런고로 종택 43곳이 현재 전하고 있는 고장이기도 하다. 안동지역을 여행하다보면 전통기와집이 지천으로 깔려는데 종택 뿐만 아니라 고택도 엄청나게 많기 때문이다. 고택의 건물이 노후화되어 겨울철에는 추위로 살기가 불편함에도 불구하고 그 후손들이 조상과 같이 숨 쉬며 살고 있음을 발견하는 것이 어렵지 않다.

안동지역의 정서상 조상이 만들어 놓은 고택이나 종택을 보존하려고 하지, 허물고 현대식 건물로 지으려고 하지 않는다. 이와는 반대로 수도권에서 종택이나 고택을 찾는다는 것은 매우 어렵다. 주인이 자주 바뀌어서 보존할 의무를 느끼지 않는다거나 전쟁으로 고택이 사라진 이유도 있지만,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과 변화에 대한 선호도가 높아서 신공법의 건물, 신건축자재로 지은 건물을 지어서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우선으로 한다. 이것이 한양은 유명한 사람이 태어났거나 살았던 집터는 많아도 고택을 찾는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이유 중의 하나이다.

고려 개국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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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루(履霜樓)

 

안동김씨 시조 김선평을 기리기 위한 재실건물. 서리를 밟고 서 있듯이 조심하고 삼가는 마음과 자세를 가지라는 의미이다.


안동 역사가 오래되었고 사람이 살기가 좋은 곳인 만큼 이곳을 본향으로 하는 성씨가 많다. 안동김씨, 안동권씨, 안동장씨, 안동강씨, 안동노씨, 안동동씨 안동문씨, 안동박씨, 안동이씨, 안동전씨, 안동조씨, 안동최씨, 길안임씨, 예안이씨, 일직손씨, 임하임씨, 풍산류씨, 풍산김씨, 풍산심씨, 풍산홍씨 등등이다.

이 중에서 고려개국공신이 셋이 배출되었다. 안동권씨의 시조 권행(權幸), 안동장씨의 시조 장정길(張貞吉)은 고창성주인 안동김씨 김선평(金宣平)과 함께 병력을 동원하여 왕건을 도와 견훤을 물리쳐 고려개국공신이 되었다. 고창(古昌)은 안동의 옛 지명이다.

우리나라에 김씨는 크게 두 가지이다. 김알지 김씨와 김수로 김씨이다. 김수로 김씨 혈족인 김해김씨와 김해허씨, 인천이씨 등을 제외한 거의 모든 관향의 김씨가 김알지 김씨이다.

안동김씨에도 두 갈래가 있다. 경순왕의 손자 김숙승을 시조로 하고, 삼별초를 평정한 김방경(1212-1300)을 중시조로 하는 구안동김씨가 있고, 신안동김씨는 고려의 개국공신으로 고창성주(고창은 안동의 옛지명)였던 김선평을 시조로 한다. 신안동김씨의 시조인 김선평의 선대가 누구인지 정확하게 알지 못하지만 김알지 김씨로 분류된다. 신라 말에 고창성주가 된 것을 보면 경주김씨 왕족과 관련된 귀족임은 분명하다고 하겠다.

청음 김상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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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서씨 가문의 신천지 소호헌

소호헌(蘇湖軒)은 조선중기의 건물로 안동시 일직면 망호리 562에 있는 보물 475호이다. 소호헌 바로 앞에는 소호라는 조그마한 연못이 있었다고 한다. 이 집은 청풍군수를 지낸 이고(李股)의 소유였는데 외동딸에게 유산 상속되었다가 외손자인 약봉 서성을 통하여 대구서씨로 소유권이 바뀌었다. 이고는 임청각 이명(李洺)의 다섯째 아들이었으며 만석꾼의 부자였다고 전해진다. 소호헌 안채에서 약봉 서성이 태어났으므로 약봉 태실이라 부른다. 고성이씨의 기운이 고스란히 대구서씨에게 옮겨간 경우라고 하겠다.

대구서씨 서해(1537-1559)에게 시집간 고성이씨 할머니는 결혼 직후 친정부모와 남편까지 여의자, 만석꾼의 재산을 처분하여 세 살 남짓한 약봉 서성(1558-1631)을 데리고 시동생이 있는 한양으로 거처를 옮겼다. 이는 어머니로써 아들의 출세를 위한 매우 정확하고도 확실한 지원책이었다. 동시에 시부모와 남편의 묘를 경북 경산에서 포천으로 이장하는 거사를 감행하였다. 고성이씨 할머니는 인생을 바꾸는데 풍수적인 요소가 중요함을 간파한 풍수내공이 남다른 여장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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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청각의 영실

임청각에도 산실이 있다. 산실을 영실이라 부른다. 사진의 우측 방이다. 임청각 가계는 며느리든 시집간 딸이든 이 방에서 출산을 했다. 앞에 보이는 우물이 영실에 기운을 공급하고 있다.

금낭경에 ‘음양의 기운이 내뿜어지면 바람이 되고 올라가면 구름이 되고 내려오면 비가 되며 땅속을 흐르면 생기가 된다’고 했다. 이 샘물이 생기를 공급하는 원천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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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성이씨 탑동종택

탑동종택을 보면 폐사지에 집을 지은 것을 알 수 있다. 이렇듯 땅은 무한으로 반복 활용되는 우리의 터전이다. 앞에 보이는 탑은 신세동 칠층전탑(국보 제16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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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소당

비안공구택이라고 함. 비안현감을 지낸 김삼근의 집으로 학조대사가 태어났음. 김삼근이 낙향하여 소산마을로 이전하여 살던 집.


신안동김씨가 고려조에 크게 현달하지 못했다는 것은 고려사에서 별다른 기록이 보이지 않는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초에 9세인 김삼근(金三近 1419-1465)이 비안현감을 지내고 안동 소산리로 낙향한 인물로 한양 벼슬길에 씨를 부렸다. 그의 장자 김계권은 한성부판관을 지냈고, 장손이 학조대사이다. 학조대사의 조카 김번(1479-1544)은 평양서윤을 지냈으며 한양에 교두보를 마련한다. 남양주시 와부읍 덕소리에 그의 묘지가 있다는 사실로 한양으로 입성하는데 성공하였다는 것을 말한다.

과거를 통하여 벼슬을 하였다고 해도 임기가 끝나면 대부분 낙향을 하게 된다. 돈이 많다고 한양에 세거지를 마련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정치적으로 왕의 신임이 두터워 사패지를 하사 받거나, 권력자의 후원을 받아야만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청음 김상헌(1570-1652)이후에 안동김씨가 조선의 명문가로 떠올랐는데, 그 이유는 그의 지조와 절개도 한 몫을 했지만, 김상헌의 외조부 정유길(1515-1588)의 후원과 김상헌의 형 김상용의 순절에 힘입은 바 크다고 하겠다. 그 당시 정유길은 대제학과 좌의정까지 역임한 막강한 집안이었다.

김상용과 김상헌의 특출함에 반한 정유길이 직접 훈육을 하였고 사랑하였다고 전해진다. 또한 김상용은 병자호란(1636년) 때 빈궁과 원손을 수행하여 강화도로 피난했다가 성이 함락되자 남문루(南門樓)에 있던 화약 위에 김반과 같이 올라 폭사하여 순절하였다. 조선시대에도 순국·순절 애국지사의 후손들에게는 특별한 은전이 주어지는 관례가 있었다.

김상헌이 병자호란 때 척화파로 나섰다가 인조가 항복하자 낙향하여 청원루에 머무는데 청나라가 명나라를 공격하기 위해 조선에 군대를 요청한 바 이를 반대하는 상고를 올렸던 것이 화근이 되어 청나라로 압송되었다. 그 때 읊었던 시조가 가슴을 아리게 한다.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 보쟈 한강수야
고국산천을 떠나고쟈 하랴마는
시절이 하수상하니 올동말동 하여라

김상헌을 필두로 손자 수흥, 수항이 영의정을 지냈고, 증손자 창집도 영의정을 지냈으며, 3명의 왕비를 차례로 배출하여, 대제학을 지낸 조순(7세손)은 순조의 장인이 되었고 8세손 중에 조근과 문근은 각각 헌종과 철종의 장인이 되었다. 정승으로는 이소(6세손), 좌근과 흥근(8세손), 병국(9세손), 병학과 병덕(9세손)을 배출했다. 병시는 내각총리대신, 병필·병지·병기·병주·병교는 판서를 지내는 등 신안동김씨의 세도정치의 절정기를 보여주었다.

신안동김씨가 철저한 집안관리로 능력자 중심으로 인재등록을 하였기에 권력을 오래 유지할 수 있었다. 다만 세도정치로 흐르면서 다양한 정보를 수집할 능력이 있었음에도 권력에 안주하여 국제정세를 정확히 판단하는데 게을리 하였고, 흥선대원군의 한풀이 정치의 빌미를 제공하였다는 점에서 매우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소산마을과 석실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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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산마을

이 마을은 본관과 성씨가 같으면서도 시조를 달리하는 두 안동김씨, 즉 신안동김씨와 구안동김씨가 4백년을 함께 세거해 오고 있다. 신안동 김씨는 신라말기 고창군(안동)의 성주로 고려의 개국공신인 김선평을 시조로 하여 9세 김삼근이 비안 현감에서 물러난 뒤 이곳 소산에 정착했다.

청원루(淸遠樓, 경상북도유형문화재 제190호), 삼구정(三龜亭, 경상북도유형문화재 제213호), 안동김씨종택(養素堂, 경상북도민속자료 제25호), 삼소재(三素齋, 경상북도민속자료 제66호), 묵재고택(默齋古宅, 경상북도민속자료 제85호), 동야고택(東野古宅, 경상북도문화재자료 제193호), 비안공구택 (敦素堂, 경상북도문화재 자료 제211호) 등이 보존되어 있는 마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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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실마을

석실마을은 경기도 남양주시 수석동 56번지 일대이다. 지금은 흔적도 없지만 이곳에 김상용·김상헌 형제를 모셨던 석실서원이 있었다. 고종 때 홍릉을 조성하면서 1868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사라졌으며 홍릉을 조성하면서 홍릉 자리에 있었던 조말생의 묘가 이곳으로 이장되어 있다. 석실마을은 안동 소산마을과 다른 듯 같은 형상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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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호송

안동시 임하면 내앞마을 사람들이 합심하여 마을의 풍수적 비보를 위해 인위적으로 만든 솔숲. 마을 바깥에서 마을이 잘 보이지 않게 가림막 역할을 한다. 외부에서 보이는 마을이면 마을의 상서로운 기운이 사라진다고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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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원루

김상헌이 병자호란 때에 척화를 주장하다가 인조가 항복하자 낙향하여 기거한 집. 이 전쟁에서 형인 김상용은 강화도에서 폭사하여 순절한다. 청원루는 그의 할아버지 김번이 살던 집터에 다시 지은 건물이다.


소산마을은 소요산을 주산으로 나지막한 구릉에 기대고 너른 풍산들을 마주하고 있는 풍요로운 마을이다. 신안동김씨의 종택 양소당과 세조·성종·중종 대에 걸쳐 국사 역할을 한 학조대사의 생가 비안공구택이 있고, 김상헌이 심신을 달래던 청원루도 있다. 증조부 김번이 살던 집터에 김상헌이 새로 집을 지어 청나라를 멀리한다는 의미로 청원루(淸遠樓)라 불렀다.

김번의 가계가 조선 후기에는 세도가문의 줄기를 형성하였는데, 이들이 교두보를 마련한 곳이 석실마을이다. 석실마을은 여러모로 소산마을과 유사하다. 사람은 고향을 떠나더라도 그 고향을 평생 잊지 못한다. 타향에서도 고향의 냄새가 나는 곳을 선호하게 되어 있다. 이는 그 가계의 유전자 즉, 기운과 관계있다고 본다. 한 가계가 한 시대를 풍미한다는 것은 하늘과 땅이 도와주지 않으면 쉽지 않은 일이다.

 
글·사진 김규순(서울풍수아카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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