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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 밀레니엄 꿈꾸는 토함산의 정기 : 김규순의 풍수이야기-경주
2020년 01월 31일 (금) 20:22:57 김규순 서울풍수아카데미 원장 www.locationart.co.kr

천년의 왕국, 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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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동마을마을 전체가 유네스코문화유산이다. 마을과 건물 하나하나에 풍수 문화가 깃들여져 있다.

신라 영역에는 진한이 있었다. 구석기 시대부터 사람이 살았고 고인돌을 비롯한 청동기 유적이 많이 발견되어서 오래전부터 정착민이 있었겠지만, BC 108년을 전후하여 고조선 유민들이 한반도로 많이 유입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BC 2333년에 건국된 고조선의 면면한 역사가 삼국이 아닌 적어도 5국으로 이어졌다고 본다. 부여(BC 2세기경~494년), 고구려(BC 1세기경~668년), 가야(BC 1세기경~562년), 백제(BC 18년~660년), 신라(BC 57년~935년)가 고조선 멸망(기원전 108년) 직후에 형성된 동이족 국가이다.

우리나라 씨족 성의 뿌리를 보면, 부여의 해씨는 명맥을 찾기 어렵고, 고구려의 성씨도 고구려 고씨와 진주 강씨 정도만 눈에 띈다. 백제의 부여씨도 백제의 멸망과 함께 흩어졌고, 가야의 성씨는 김해 김씨와 김해 허씨만 남았다. 남았다. 박·석·김 신라 왕족과 이·최·정·손·배·설·윤·조씨가 신라의 성씨이다. 역사의 승자였던 신라의 혈족들이 이 땅을 경영하고 있다.

서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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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백당서백당은 양동마을의 뿌리이다. 손소가 장가들어 자식(손중돈)을 낳은 곳이며, 외손주(이언적)를 받아낸 곳이다. 그리고 그 후손들이 마을공동체를 이루고 살아가는 마을이다. 서백당에서 머리방, 즉 산모가 아기를 낳는 산실을 찾기란 어렵지 않다. 대부분 사각형 기둥인데 산실은 둥근 기둥이다. 사각은 땅과 육체를 뜻하므로 살림집이나 안채의 기둥으로 쓰인다. 둥근 기둥은 하늘 즉, 정신을 나타내므로 교육시설이나 사당에 쓰이는데 산실에도 세우고 있다.

경주에는 월성 손씨와 여강 이씨 가문이 600여년의 세월을 쌓아서 만든 양동마을이 있다. 일반적으로 마을들이 산으로 둘러싸인 오목한 곳에 자리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양동마을은 집들이 산등성이를 올라타고 있다. 고택에 들어서면 경관이 멋있다. 그것을 서양적 표현으로 뷰(view)라고 한다. 뷰를 과감하게 선택한 양동마을은 서양인들의 구미에 맞아떨어져 찬사를 자아내게 만들었고, 현재 가장 아름답고 빼어난 우리나라 전통마을로 꼽힌다.

황룡사터와 토함산 황룡사터 뒤로 토함산의 막내 형제봉이 보인다. 경주의 주요 영역은 토함산의 정기가 가득 차 있다. 황룡사가 재현되면 토함산의 정기가 다시 흥기할 것이다.

월성 손씨의 입향조인 손소(1433~1484)가 양동에 터전을 잡고 살던 류복하의 외동딸에게 장가를 들어 처가의 재산을 상속받는다. 손소의 차남이 우재 손중돈(1463~1529)으로 성종 때에 등과하여 중종 때에 정2품 우참찬에 오른다. 손중돈은 어머니의 재산으로 공부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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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성대국보 제31호. 신라시대에 하늘을 관측한 천문대.

동궁과 월지(안압지)신라통일 후 문무왕 14년(676)에 만든 궁궐의 원지(苑池)이다. 맹자에 문왕이 영대(靈臺)와 영소(靈沼)를 만들었다는 대화가 있듯이 원지를 만드는 것은 임금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백제에는 부여 궁남지가 있었으므로, 신라가 궁남지를 모방했을 것이라는 추측도 가능하다. 땅을 파서 만든 인공연못이다. 땅을 판 흙은 월지 옆에 쌓아 가산(假山)을 만들어 새와 짐승을 키웠다. 경회루 연못을 만들고 나온 흙으로 아미산을 만든 것은 이와 상통한다.

그리고 이번(1463~1500)이 손소의 딸이자 손중돈의 여동생에게 장가를 들어 양동마을에 정착하여 회재 이언적(1491~1553)을 낳는다. 회재 이언적은 조선 정통 성리학의 주축을 이룬 분으로 벼슬은 의정부 좌찬성에 이르렀다. 우재 손중돈과 회재 이언적이 ‘머리방’이라 부르는 월성 손씨의 서백당(書百堂)의 산실(産室)에서 태어나고, 두 사람 모두 정승이 되었으므로, 서백당이 명당임을 증명하였다. 이곳은 외손 발복하는 집이다. 서백당은 손중돈의 외가였으며, 그후 손소의 류씨 부인이 재산을 물려받았고, 류씨 부인의 외손이 이언적이었다. 서백당이 서백당다운 권위를 가지려면 딸과 외손들이 모이는 집이어야 한다. 월성 손씨만의 가문 번성을 생각하다보니 출가한 딸들이 서백당에 얼씬도 하지 못하게 한다는 풍문이 들린다.

명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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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암 이알평 탄강지동이족의 시조설화에 알에서 태어나는 경우가 많다. 천손민족으로 그 뿌리가 하늘에 있음을 나타내기 위함이기도 하다. 새는 하늘의 전령이므로 새의 알은 신성한 상징물이다. 또한 알은 남성의 상징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난생신화는 모계사회가 부계사회로 넘어가는 과정임을 말해준다. 난생설화의 주인공은 거의 왕이 된다. 경주 이씨의 시조 이알평은 알에서 태어났지만 왕이 되지 못했다. 다만 박혁거세를 발굴하여 신라를 만든 기초 작업을 했던 육촌장의 주도적 인물이었다. 그후 신라 무열왕 때에 은열왕으로 추봉되었다. 그의 후손으로 고려조에 이제현, 조선조에 이항복을 배출했으며, 현대에는 이병철과 이명박이라는 인물을 배출하기도 했다.

옛날 종가댁이나 고택은 예식장이었고, 산부인과 병원이었으며, 연극 무대였고, 커피숍과 같은 모임 장소였다. 가문의 영광은 그 집안 사람들의 성공여부에 달렸다. 명망 높은 학자가 배출되거나 왕비나 정승판서가 나오면 그들의 생가는 일약 명당반열에 오른다. 소위 풍수적 명당이란 무엇인가. 명당이라면 출세하는 사람이 나와야 하고, 출세한 사람이 나오면 명당인거다. 자물쇠에 맞는 열쇠를 넣으면 열리듯이 풍수의 결론도 간단하다. 이렇게 간단한 공식을 믿지 않는 사람이 많다. 좋은 땅, 좋은 자리는 분명 있는 것 같은데, 그것을 믿기란 쉽지 않다. 필시 외계인의 말 같이 듣기도 하고,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 같아 아예 모른 척 외면해버린다.

그런데도 장사하기 좋은 자리를 찾고, 합격 잘되는 고시원을 찾으며, 돈 많이 버는 점포에 눈독들이기도 한다. 보다 좋은 자리는 우리 곁에 항상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여기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좋은 자리를 차지하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과의 차이는 엄청나다. 어떤 사람은 날마다 쌓이는 돈에 즐겁기만 한데 또 어떤 사람은 적자에 허덕이다 부도낸다. 노력만으로 부자가 된다면 부자 안 되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조상들은 부자가 되거나 출세를 하는 열쇠는 땅 보는 기술, 풍수에 있다고 생각했었다. 우연하게 좋은 자리에 들어가는 운 좋은 사람도 있다. 어쨌든 땅의 도움이 없으면 부자가 되거나 큰 벼슬까지 올라가지 못한다는 것이 풍수의 사상적 배경이다.

신선이 된 최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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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복사터고운 최치원 선생의 사산비명(四山碑銘) 중 “신라국초계산대숭복사비명”에 적힌 내용에 숭복사와 원성왕릉에 대한 풍수 의견이 아주 상세하게 적혀 있다. 신라의 풍수 상황을 비교적 자세하게 알려주는 기록으로 풍수가 청오자를 언급하고 있음을 볼 때, 당나라의 풍수가 유입되어 활용되고 있음을 알려주는 귀한 내용이다. 숭복사지에는 두개의 삼층석탑이 남아 있다.

원성왕릉(괘릉)최치원의 풍수로 사찰(鵠寺)이 원성왕릉으로 바뀐 곳. 신라왕릉으로는 보기 드물게 망주석과 무인석 그리고 사자석상이 설치되어 있다.

최치원(崔致遠)은 경주 최씨의 시조이다. 역사적으로도 비중이 큰 인물이지만, 경주 최씨 문중에서는 감히 입에 담기도 어려운 큰 어른이시다. 당나라에 유학하여 18세의 나이로 장원급제하였고 황소의 난을 평정한 인물로도 유명하다. 최치원의 현묘지도에 뿌리를 둔 풍류사상은 우리나라 도학(道學)의 원류이다. 그의 풍류사상은 난랑비서(鸞郞碑序)에 전한다.

"우리나라에는 현묘한 도가 있으니 이를 풍류라 한다. 이 가르침을 설치한 근원은 선사(仙史)에 상세히 실려 있거니와 실로 삼교(三敎)를 포함한 것으로 모든 민중과 접촉하여 이를 교화하였다. 또한 그들은 집에 들어와서는 부모에게 효도하고 나아가서는 나라에 충성을 다하니, 이는 노나라 사구(司寇:공자)의 교지이며, 또한 모든 일을 거리낌 없이 처리하고 말 아니하면서 일을 실행하는 것은 주나라 주사(柱史:노자)의 종지이며, 모든 악한 일을 하지 않고 모든 착한 행실만 신봉하여 행하는 것은 축건태자(竺乾太子:석가)의 교화이다." - [삼국사기, 국역]

최부자집 토함산과 이어진 낮은 구릉의 끝자락이 남천을 만나는 곳에 지어진 집이다. 신라시대에는 반월성에서 가까워서 왕족이 살았던 곳인데 요석공주가 살았던 요석궁이 있었던 곳이다. 원효대사가 파계하고 소성거사로 천하를 주유하다가 요석공주와 사랑을 나눈 이야기가 스며있다.

최치원의 도학적인 경지는 이미 최고조에 이르렀으며 기이한 행적으로도 회자되고 있다. 율곡 이이는 “꿈에 학을 타고 날아온 신선을 만나서 대화를 나누었는데, 누구냐고 묻길래, 신라학사 유선(儒仙: 최치원)이라고 여쭈었더니 거문고 연주로 화답을 했다”고 유가야산부(遊伽倻山賦)에 적고 있다. 이수광은 “조선 중조 때의 문인 남추는 하인에게 편지를 보내어 청학동에서 신신이 된 고운선생에게서 청옥으로 된 바둑돌을 얻어와 친우들과 즐겨 그 돌로 바둑을 두었다”고 지봉유설(芝峯類說)에 기록했다. 퇴계 이황은 “유학자로 즐거이 신선의 경지를 터득하셨으니, 내 비록 늙었으나 뒤따르고 싶은 마음 간절하네.”라고 시를 읊었다. 고운 최치원 선생의 생전에 읊은 추야우중(秋夜雨中)은 교과서에 실려 있어 매우 친근하다.

가을바람에 괴로워 읊조리건만
이 세상 날 알아주는 벗 드물고
한 밤중 창 밖에 비가 흩날리니
등불 앞 마음은 만 리 밖을 달리네
- [추야우중, 계원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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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릉원이 땅에 살다간 신라 귀족들의 흔적이다.

감은사지호국 사찰터이다. 왜적의 침입을 감시하고 막아내는 역할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 감은사의 자리는 경주로 들어가는 길목에 있다. 매우 수려한 자태를 뽐내고 있는 감은사지 동서 삼층석탑은 국보 제112호. 문무대왕릉이 바다를 지키고 감은사가 육지를 지키는 이중방어 시스템이다.

경주에는 경주 최씨의 역사가 쌓여있다. 조선 초 최치원의 11세손 최예(崔汭)에서 하나의 최씨 가문이 분파된다. 교동에 있는 경주 최부자집은 조선 중기 명종 때 최예의 6세손 진립에서 시작하여 동량(7세손), 국선(8세손), 의기(9세손), 승렬(10세손), 종률(11세손), 언경(12세손), 기영(13세손), 세린(14세손), 만희(15세손), 현식(16세손), 준(17세손)으로 만석꾼 최부자의 혈맥이 이어져왔다. 부자 3대라는 말을 무색하게 만든 경주 최부자집은 철저한 자기관리로 12대를 이어 부를 지킨 명문가였다. 최예의 후손에서 기인이 나타났으니, 6세손 진흥(진립의 형)의 후손에서 동학교조 최제우(13세손)가 태어났다. 그리고 동학 2대 교주 최시형도 경주에서 태어났으니 경주 땅의 기운이 신라 천년을 넘어 다시 천년을 연결하고 있었다. 이제 세 번째의 천년(The third millennium)을 맞이하고 있는 시점에서 토함산의 정기로 다시 한 번 더 큰 통일의 꿈을 이룰 수 있다고 믿는다.

 
글·사진
김규순(서울풍수아카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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