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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승지의 예천권씨, 길목을 차지한 동래정씨
2020년 01월 19일 (일) 11:22:13 김규순 서울풍수아카데미 원장 www.locationart.co.kr

 

 

풍양면 우망리 동래정씨가 고려 말 환란을 피하여 안동으로 이주한 사람이 정승원이고, 그의 손자 정구령이가 길지를 찾아 옮겼다는 곳이 서우망월형의 지형이라고 알려진 우망리이다. 한양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동네라서 한양 정보에 밝았을 것이다. 이는 후손들이 한양으로의 정치적인 성공을 위한 정구령의 풍수적 선점을 위한 한 수였다.

예천(醴泉)이란 지명의 유래는 특이하다. [장자]에서는 ‘봉황은 오동나무가 아니면 앉지 않고 대나무 열매가 아니면 먹지 않으며 예천(醴泉)이 아니면 마시지 않는다.’는 신비의 물로 표현하고 있다. [예기]에서는 ‘태평성대에 하늘에서는 단맛의 이슬이 내리고(天降甘露) 땅에서는 단맛의 샘물이 솟는다(地出醴泉)’라고 기록하고 있다. [택리지]에서도 ‘사람이 살만 한 곳은 물이 달고 토지가 비옥한 곳’이라고 했으니 예천은 최고 등급의 고장이 아니겠는가.

맛이 단 샘물이 솟아나는 고장 예천

 

오미봉(五美峰)에서 본 금당실마을 전경과 송림 팔방으로 산으로 둘러싸인 아름다운 금당실마을의 전경. 마을 중앙에 100-200년 묵은 소나무로 송림이 조성되어 매우 특이한 공간을 지니고 있는 마을이다. 마을을 거닐어 보면 싱그러운 햇빛과 함께 은은한 솔향기를 즐길 수 있다. 이곳이 신선이 노니는 곳이 아니겠는가. 금당실마을에는 종택과 고택이 많이 있다. 여유롭게 시간을 가지고 옛길을 거닐면서 자연을 즐기기에 아름다운 마을이다.

예천은 백두대간 남쪽에 위치하지만 영주나 문경처럼 직접 백두대간을 안고 있지는 않다. 소백산에서 흘러나온 한 줄기 굵은 능선과 내성천이 만든 고장이다. ‘단술이 솟아나는 샘’이라고 예로부터 일컬어온 예천군과 같은 뜻의 감천면이 지명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천에는 예천이 없다.

선몽대(仙梦臺)퇴계 이황선생의 오촌 조카 이열도가 1563년에 내성천 변 암반 위에 지은 건물이다. 선몽대의 현판은 퇴계선생의 친필이다. 이 건물은 뒷편에 있는 백송마을에 경고해주기 위해 지어진 수구막이 건물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선몽대는 ‘하늘에서 신선이 내려와 노는 꿈을 꾼 곳’이라는 뜻으로 조선 사대부의 도가사상을 엿볼 수 있다.

대동여지도에도 예천의 샘물인 ‘주천(酒泉)’이 기록되어 있다. 지금 예천군청은 노하리에 ‘주천’을 복원하여 그 유래를 남기고 있으나, 이는 일제가 개발한 우물이고, 원래의 주천은 대창고등학교 아래 노상리에 있었는데 수도가 보급되면서 메워버리고 주택가로 변해버렸다. 역사에 기록된 단맛의 샘물, 우리 조상들이 마시던 그 샘물을 지금 우리는 마실 수 없다. 예천의 상징성이 사라져 안타깝다.

금당실마을로 들어오는 산줄기 사진 중앙의 중첩된 산 아래가 금당실마을이다. 산이 단계를 밟으면서 마을로 들어오고 있다. 멋진 경관이 아닐 수 없다.

금당실마을의 예천권씨

 

예천권씨 초간종택과 별당(보물 제457호)초간종택의 안채는 'ㅁ'자형이고, 사랑채는 별당식 건물이다. 우측 옆으로 사당이 있으며, 앞마당에 길쭉하게 빈 공간을 조성하고 그 끝에 연못을 조성하여 향나무를 식재했다. 별당위에 오르면 이 집을 지은 권오상의 탁월한 풍수적 공간미학을 즐길 수 있다.

금당실마을은 예천군 용문면 일대이다. [정감록]에 “이 땅에는 난의 해가 미치지 않는다. 그러나 이곳에 임금의 수레가 닥치면 그렇지 않다.”고 하며 십승지(十勝地)로 꼽고 있다.

병암정 예천권씨 병암문중이 소유한 건물로 1898년 지어졌다. 물이 금당천이 충하는 곳에 버티고 있는 수구막이 바위 위에 지어진 정자이다. 옛날 물이 흐르던 곳을 연못으로 만들었다. 금당실의 너른 평야가 한 눈에 들어오며 농사와 홍수를 관리하기 좋은 자리이다.

십승지란 전쟁과 반란으로부터 몸을 보전할 수 있는 땅을 말했다. 십승지를 보면 사람들의 왕래가 잦은 큰길과 많이 떨어져 있어서 지리적으로 내륙 산간에 위치한 오지이다. 오지라는 개념 외에 십승지는 이상향을 뜻하기도 한다. 금당실을 살펴보면 자연분지 지형으로 외부지역과 내부마을공간과의 경계가 뚜렷하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외부와 마을로 통하는 길은 금곡천과 산줄기가 태극 모양으로 맞물려 있어서 접근이 쉽지 않다. 높은 소백산 줄기에서 공급되는 계곡수가 끊임없이 흐르며, 비옥하고 너른 농경지와 남향의 온화한 미기후의 지리적 조건을 갖추고 있어서 경제적으로 자급자족이 가능하다. 십승지는 풍수적 관점으로 선정된 곳으로 배산임수와 함께 자연입지경관이 뛰어나며 길지의 조건을 갖추고 있어서 취락을 형성하는데 어려움이 없다. 금당실마을에 감천문씨가 들어와 살면서 손자사위인 함양박씨와 원주변씨가 들어와 살게 되었다고 하나, 이는 15세기의 일이다. 정작 이곳의 터줏대감은 예천권씨일 것이다.

초간정(草澗亭)권문해(1534-1591)가 초가를 지어 놓고 노닐던 곳으로 초간의 현손이 1870년에 지은 정자. 물이 들이치는 암반과 송림이 조화롭게 어우러져 무위자연의 도가사상을 느끼게 한다. 초간(草澗)은 권문해의 호. 이황(李滉)의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1560년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관찰사를 지냈다. 단군시대로부터 인문·지리·역사·문학·예술·철학 등을 총망라한 백과사전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郡玉)_보물 제878호]을 지었다.

예천권씨는 원래는 흔(昕)씨로 천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가문으로 예천의 토성이다.

[고려사절요]에 고려 태조 때에 안수진 성주 흔평, 마산 성주 흔신, 대장군 흔악, 원윤 흔휘의 관직과 이름이 보이며, 현종 2년의 개심사 오층석탑기에 광군 흔경(昕京)의 기록이 보인다. 고려 충목왕의 이름이 흔(昕)이어서 이를 피하기 위해 흔섬(昕暹)은 외가의 성인 권씨로 고쳐서 권섬으로 바꾸었다고 예천권씨족보에 기록되어 있다. 조선 초기에 중앙정치무대에 활발하게 진출하였으나, 연산군의 무오사화로 가문이 치명타를 당하여 많은 족인들이 살기위해 안동권씨로 변경하는 바람에 문중의 세력이 약화되었다.

풍양면 청곡리 사진 좌측에 정구령이 지었다는 삼수정이 보인다. 그가 거처한 곳은 우망리 건너편에 있는 청곡리이다. 청곡리에서 정난종과 정광필이 태어났다. 우망리와 인접한 곳이지만 지명은 다르다. 사진 좌측 뚝방 너머는 낙동강이다.

금당실마을에서 1km 떨어진 죽림리에 예천권씨의 초간종택별당이 단아한 모습으로 청아하게 앉아있었다. 풍수적 자연환경에 있어서 가옥은 안산을 중요시 여긴다. 예천권씨 종택 앞은 너른 논밭으로 형성되어 있어서 안산이 없는 아쉬움이 있다.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면 안산을 대신하는 연못을 만들었고 그 옆에 울릉도에서 가져왔다는 300년 묵은 향나무가 안산을 대신하고 있었다. 가옥에서는 좀 채로 드러나지 않는 전순을 잔디밭으로 가꾸고 그 끝에 연못을 만들었으니, 종택을 지은 분의 풍수공간에 대한 미학적 경지를 나눌 수 있어서 반가웠다. 예천권씨 문중의 초간정과 병암정을 보면 물이 때리고 지나가는 바위를 벗삼아 그 곳에서 수행을 하였기에 세상의 부귀영화에 뜻을 두기보다는 자연을 벗하며 유유자적한 삶을 즐긴 노장사상이 스며들어 있다. 유학을 국시로 한 조선에서 현달한 인물이 적은 것은 무오사화의 영향으로 은거형 전략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대창고등학교

 

대창중고등학교 행정관 예천지방 유림이 단합해서 1922년 건립한 중고등학교. 학교 내 행정관사는 300년 된 예천관아 건물이다. 일제시대에 옮겨진 전통 건물로, 이런 건물을 간직하고 있는 거의 유일한 중등학교이다.

예천향교를 찾아갔다. 향교란 옛 조상들이 공부하던 곳이기에 그 얼을 되새기고자 필히 찾는 곳이다. 과연 선조들께서 공부하던 분위기는 어떤 곳일까 하는 호기심의 발로이다.

석문종택(경북 문화재자료 제492호)석문 정영방의 집이다. 동래정씨 종택으로는 거의 유일하게 문화재로 등록되어 있다. 동래정씨 문중에도 종택과 고택이 많이 있으나 관리가 되지 않고 있으며 문화재 지정도 하지 않아서 보존관리가 되지 않고 있었다.

예천향교를 찾아보니 바로 옆에 대창고등학교가 있었고 그 옆에 셋방살이 하듯이 향교의 외삼문이 학교 정문 옆에 붙어 있었다. 야릇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궁금증이 생겨 학교를 둘러보니 오래된 대형 전통기와 건물이 눈에 확 띄었다.

의성김씨남악종택 금당실마을에서도 한참 떨어진 구계리에 있는데 산 속에 숨어있다. 자연의 지형이 아늑한 곳에 종택이 자리하고 있다.

동래정씨 집성촌

 

예천권씨 초간종택연못과 향나무 사대부의 집에서 이렇게 아름다운 풍수적 공간미학을 만나는 것은 쉽지 않다.

현우택 교장 선생님께 그 사유를 청해들은 바, 1922년 대창학원이 예천유림에 의해 만들어졌으며 그 당시에 학교부지가 이곳에 마련되었다. 유림에서 땅을 희사하였을 것이니, 그 의문이 풀렸다. 재정이 약하여 건물을 짓지 못하던 중 1927년 철거하려는 관아 객사건물을 이건하여 학교 교사로 이용하였다는 것이다. 학교 건물로 사용하기 위해 내부구조를 변경하기도 하고 시멘트를 사용하기도 했으나 300년 건물은 전체적으로 잘 유지되고 있었다. 전국적으로 유림이 건립한 학교가 많지 않지만, 이런 오랜 건물을 간직한 학교도 없을 것이다.

서우망월형(犀牛望月形)으로 소문난 동래정씨의 집성촌 우망리 마을을 찾아갔다. 우망리에서 고개를 하나 넘어가면 삼강주막이 있는 삼강리이다. 삼강주막에서 낙동강을 건너면 문경이고, 문경에서 새재를 넘으면 충주에 도달한다. 충주에서 배를 타고 한양에 도달한다. 그러고 보면 우망리는 한양가는 길목을 지키는 마을이었다. 조선시대에 성공이란 과거에 급제하여 한양에서 벼슬하는 것이다. 조선시대의 한번 벼슬은 평생을 전관예우 혜택을 누리는 철밥통이었다. 서우망월형이란 무소가 달을 쳐다보는 형국이란 뜻인데, 이를 뒤집어 생각해보면 ‘한양에 가서 과거 합격할 일’만 생각하라는 목표지향적인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정작 정구령이 이주하여 살았던 곳은 우망리 건너편 정구령이가 지었다는 삼수정이 있는 청곡리이다. 청곡리에서 정난종과 정광필이 태어났다. 정구령의 셋째 아들 정난종이 한양 입성에 성공하여 이조판서를 지냈고, 정난종의 아들 정광필은 영의정에 올랐다. 그리고 정광필의 후손에서 12명의 정승이 나왔으니 정구령의 길지 선택은 성공한 것이다. 인생을 바꾸고 집안을 일으키려면 삶의 공간을 바꾸어야 한다. 공간이 바뀌면 인연도 바뀐다. 인연이 바뀌면 인생도 바뀌는 것이다. 인생은 불확실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선택과 집중이 중요하다. 공간적인 선택과 시간적인 집중이 맞아 떨어지면 성공할 수 있다.

자연의 아름다움을 찾아 노장사상적 생활을 영위한 예천권씨 가문과 한양길 옆에 부락을 이루고 살면서 입신양명을 위해 노력했던 동래정씨 가문에서 나타나는 결과는 크게 달랐다. 어느 선택이 옳았느냐 하는 물음이 아니라 어떤 땅을 선택하여 살았는가에 따라 후손에게도 많은 영향을 미친다는 풍수적 의미를 되새겨 본다.

개심사터 오층석탑(보물 제53호)오층석탑 뒤로 흑응산(200m) 정상에 청하루(淸河樓)가 있다. 오층석탑의 사면에 조각이 섬세하며 탑이 조성된 내력이 명문으로 새겨져 있는 것이 특징이다. 고려 현종 때(1010년)에 시작하여 1011년에 세워진 탑이다. 탑 조성에 관련한 주요 인물 20여명의 이름이 적혀 있다. 사방이 탁 트여진 곳에 지어진 사찰은 오래 지탱하기 어렵다. 사찰 내부적으로는 공부에 전념하기 어려워 규율이 무너지고, 외부적으로는 승려들이 세속의 이익에 오염되어 마을사람들과 다툼이 일어날 소지가 있을 것이다. 전쟁이나 환란으로 소실될 위험도 있다. 탑의 상태로 보았을 때, 화재로 사찰이 사라진 것으로 추정된다. 부처님의 가호로 천년의 세월을 이기고 서 있는 모습이 아름답다.

 
글·사진
김규순(서울풍수아카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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