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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수의 시작은 어머니
2020년 01월 11일 (토) 09:39:16 김규순 서울풍수아카데미 원장 www.locationart.co.kr
모계사회 ‘보금자리’ 선정은 풍수 주역 生生 원리에 부합

인류가 언제부터 생겨났는지는 아직 아무도 모른다. 출토 유골에 의해서 자꾸만 소급되고 있다. 200만년전에서 300만년전으로, 또 400만년전(?).

그럼에도 사람이 여자와 남자, 부인과 남편, 어머니와 아버지로 구성돼 있는 것은 변함이 없다. 여자, 부인, 어머니가 같은 사람일 수 있고, 마찬가지로 남자, 남편, 아버지도 같은 사람일수 있지만 역할에 따라 성격은 엄청나게 다르게 나타난다.

어디에 있던지 간에, 어떤 지형에서든지 간에, 여자와 남자, 부인과 남편, 어머니와 아버지는 자리 잡기의 개념이 서로 다르다.

수렵채취시대, 즉 구석기시대는 인간이 살아온 세월 중 99%를 차지하며 이때의 생활이 인간의 본능에 미치는 영향이 지대하다고 본다. 인간의 몸과 마음은 진화의 산물이다. 의학적으로도 인간의 병은 진화의 과정에서 나타나는 부조화가 원인이라고 보는 예가 다수 있다. 마음이나 생각도 마찬가지이다. DNA는 새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전달받은 것이다. 그러면서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며 진화하고 있다. 생명은 매번 창조되는 것이 아니라 전달되고 있다. 수억년의 역사를 가진 진화의 데이터가 새겨져 있는 DNA를 전달 받는 것이다.

수렵채취시대에 자리 잡는 이야기를 해보자.

남자와 여자, 부인과 남편은 자기들의 보금자리를 만들기 위해 자리를 잡았을 것이다. 수렵하는데 관찰하기 좋은 자리나 과일이나 곡식이 많이 자라는 곳 부근일 것이다. 그들은 한 곳에 오래 머무르지 않았다. 아프리카의 누우 떼가 이동하듯이 그 당시에도 다른 많은 동물들이 이동했을 것이고 이를 따라 사람도 이동했을 것이다.

사람이 이동했다는 설정은 역사적으로도 증명된다. 아프리카에서 나타나 인류가 전 세계로 퍼졌으니, 인류의 이동은 지금까지도 진행되고 있다.

■가문을 융성케한 어머니의 풍수

이동에 가장 취약한 사람이 임산부와 영아 그리고 어린이이다.

수렵채취시대에 먹거리를 사냥이나 채집에 의존해야 하므로 한 곳에 오래 머무를 수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약자인 임산부와 영아 그리고 어린이는 먼 거리나 잦은 이동이 불가능하다. 또한 모계사회이므로 자식 양육의 책임은 오로지 어머니의 몫이었다. 오직 어머니만이 생계를 책임지는 리더였다. 자식 중에 장성한 남자가 곁에 있으면서 사냥거리를 잡아오면 다행이고, 지나가는 남성이 머물면서 사냥한 동물을 가져오기도 했을 것이다.

이러한 생태적인 모습은 동물의 왕국에서 나오는 사자의 무리나 코끼리의 무리를 관찰하면 쉽게 이해된다. 구석기 시대는 혼교의 풍습으로 아버지의 권리나 의무가 존재하지 않았거나 미미했다. 아버지는 없었으며 돌쇠와 마당쇠만이 있었다.

남자는 강하고 힘이 넘치므로 사냥을 위해 사냥감을 쫓아다녔을 것이다. 그룹과 떨어져 있는 시간이 많았을 뿐 아니라, 많은 위험으로 돌아오지 않는 경우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생존의 법칙에 따라 어머니가 그룹의 리더였다. 영유아에게는 어머니가 생존의 울타리였다. 어머니는 영아와 임산부 그리고 어린이의 생존을 위해 판단하고 행동했다. 동물로부터 쉽게 공격당하지 않는 장소, 보다 손쉽게 열매나 곡물을 얻을 수 있는 장소, 사냥터와 가까운 위치, 그리고 바람이 부드럽고 습하지 않는 자리를 잡는 것이 급선무였다. 가능한 한 안전하게 오래 머물 수 있는 자리여야 했다.

가장 위협적인 위험은 자연재해였다. 더위와 추위, 홍수와 가뭄, 태풍과 산불, 굶주림과 질병, 자연에 대한 지식의 축적만이 이러한 자연재해를 피해 생존의 가능성을 높일 수 있었다. 인류가 신체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은 것은 어머니의 모성애에서 발현한 현명한 판단에 근거한다. 어머니의 지형지물을 이용하는 단계를 넘어선 풍수적인 판단에 의해서 우리가 살아남은 것이다.

역사적인 기록이 가장 풍부한 조선시대를 살펴보아도, 어머니의 풍수실력이 가문을 융성하게 만든 실례가 많다.

■ 바르게 살고 잘 살기 위한 방책

- 울산김씨 가문에 시집간 여흥민씨

여흥민씨는 태종 이방원의 부인인 원경왕후와 사촌 간으로 한성부윤 민량의 딸이었다. 태종이 충녕대군을 세자로 책봉하는 것을 반대하는 처남인 민무구·민무질 형제의 세력을 제거한다. 이 때 남편 김온도 죽음을 당하자, 위험을 느낀 여흥민씨는 아들 셋과 함께 전남 장성군 황룡면 맥동리로 피신한다. 그녀는 무학대사로부터 전수받은 풍수학을 활용해 집터를 마련하고 신후지지도 마련한다. 그리고는 ‘말을 탄 자손들이 집안에 가득할 것이다’라고 예언했는데, 문묘에 배향된 김인후, 부통령 김성수, 대법원장 김병로, 국무총리 김상협, 국회부의장 김녹영 등의 인물이 배출됐다.

- 대구서씨 가문의 고성이씨
약봉 서성의 어머니인 고성이씨는 남편 서해가 결혼 3년 만에 죽는다. 외동아들 약봉이 3살이 되자, 약봉의 모친은 안동의 집을 팔아서 상경하여 지금의 약현성당 부근에 집을 짓는다. 집을 지을 때 안동에 있을 때 노비들이 상경하여 도와줬는데, 안동을 떠날 때 노비들을 면천시키고 재산을 분배해준 고마움에 대한 답례였다고 한다.

그녀의 집터 선정과 집짓기는 안동의 명문가 고성이씨의 종택인 임청각을 지은 풍수적인 지식을 빌렸을 것으로 생각된다. 임청각은 그녀의 큰아버지(이명)가 1515년에 지은 집이다. 그리고 시조부모와 시부모의 묘지를 경북 경산에서 경기도 포천으로 옮긴다. 천리가 떨어진 낯선 곳에다가 무덤을 옮긴다는 것은 지금으로서도 경제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어려운 일이다. 그렇게 한 까닭은 자식들을 위해서 조상들을 명당에다가 모시기 위함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시집가자마자 남편이 죽었으므로 조상 무덤이 잘못된 것이라는 결론을 내린 것이다. 그녀의 엄청난 노력으로 대구서씨 약봉의 가문은 승승장구하여 3대 정승과 3대 대제학을 배출하여 6대 연속 가문의 영광을 누렸던 것이다. 근대에도 독립운동가 서재필과 제헌국회의원 서정희, 독립운동가 서범석과 같은 인물을 배출했다. 약봉 어머니의 풍수적인 결단력과 실천력을 바탕으로 대구서씨는 약봉을 필두로 크게 번창하여 신사임당에 비견되기도 한다.

그 외에도 한양에서 강릉까지 임산부의 몸으로 이동하여 오죽헌을 선택하여 이율곡을 낳은 신사임당의 풍수적 결단력을 보여주고 있으며, 경주 손씨는 친정집의 서백당(정승이 세명 나온다는 아기 낳는 방)을 선택하여 주산인 설창산의 정기를 받아 회재 이언적을 낳았던 것이다. 경주손씨 집안에서는 그 후로 시집간 딸이 서백당에서 몸을 풀지 못하게 하고 있다.

어머니는 죽어서도 후손들을 강력하게 보호해주는 수호신 역할을 하는 매우 귀한 존재이기도 했다. 이것은 유전학자들에 의해 밝혀진 '사람의 미토콘드리아 DNA(mtDNA)가 모계를 통해서만 전해진다'는 사실로도 이해가 가는 부분이다.

어머니가 자식들의 생존을 위해 풍수적인 노력을 한 예가 가문마다 쌓여 있다. 시집간 딸이 아버지의 장례에 문상을 와서 친정아버지의 무덤자리에 물을 퍼 넣어 장례를 치르지 못하게 하고 자기 남편을 묻었다는 풍수 설화는 가문마다 발견된다. 기계 유씨(밀양박씨), 영일 정씨(연안이씨), 밀양 박씨(현풍 곽씨), 함안 오씨(한양 조씨), 함양 박씨(광산김씨), 밀양 손씨(동래 정씨), 영양 남씨(옥산 장씨) 등등.

어머니의 자리 잡기는 주역의 생생(生生)의 원리에 부합한다. 살기 위한, 살리기 위한 자리 잡기이다. 출세를 위한 자리 잡기가 아니다. 잘 살려고 노력하다보니 시운(時運)이 따라서 벼슬도 얻고 학문도 이루어 명예가 뒤따르는 것이지, 벼슬을 위해 권모술수를 부린 것이 아니다. 풍수는 바르게 살고 잘 살기 위한 방책이며, 요행을 바라고 행하는 학문이 아니다. 풍수는 자연발생적이며 우리의 삶과 떼어놓을 수 없는 공기와도 같은 민족의 학술(學術)이다.

알려지지 않았지만 많은 어머니들의 자리 잡기의 노력들이 오늘날 우리가 생존해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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