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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산신씨 무맥의 활화산
2019년 12월 10일 (화) 17:00:37 김규순 서울풍수아카데미 원장 www.locationart.co.kr

 

 

칠사산과 해공 신익희 선생의 생가마을 서하리. 사진의 좌우로 길게 늘어선 능선에 기댄 마을이다. 남한산성을 배경으로 한 칠사산의 용맥이 서하리의 등뼈가 되어 북쪽을 받혀주고 있어서 안정감이 있다. 칠사산이 버텨줌으로 해서 경안천이 휘돌아 흐르면서 문전옥답이 생겨났다. 산이 삶의 터전을 마련해 준 것이다.

경기도 광주의 무갑산(武甲山, 581.7m)에 묻힌 신립 장군은 40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패전의 한을 삭이며 왜군이 지나간 길목을 지켜보고 있다. 그가 묻힌 산 이름이 갑옷으로 무장한 산이다. 항상 유비무환의 자세를 잊지 말라는 교훈이다. 일제강점기에 온 백성이 신음할 때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자극받은 해공 신익희(申翼熙, 1894-1956)는 신립의 11대손으로 대한민국의 독립을 위해 분연히 몸을 던졌다. 조상이 잠든 무갑산의 정기를 받은 신익희는 항일운동의 본거지인 임시정부에서 독립의 불꽃을 태웠고, 건국 후에는 독재에 항거하는 민주세력의 지도자로 우뚝 섰다.

천년을 이어온 명문 세가의 시조 신숭겸(申崇謙) 장군

1. 경안천과 칠사산이 만든 문전옥답이 펼쳐진 서하리 생가마을.
2,3. 무갑산 신익희 선영-고조, 증조, 조부, 선친의 묘가 있는 곳.

평산신씨 시조 신숭겸(?-927)은 고려개국의 1등공신이다. 팔공산 전투에서 고려군은 대패해 많은 군사를 잃고 왕건은 간신히 도망을 하는 신세가 된다. 후백제의 견훤에게 포위되어 위급한 상황이 되자 신숭겸 장군은 왕건에게 도망갈 시간을 벌어 주기 위해 왕건의 갑옷과 마차를 타고 적진으로 돌격하여 주군을 대신해 전사한다. 그는 역사에서 충정과 의기의 상징이 되었다.

신숭겸은 광해주(光海州, 지금의 춘천) 사람이라고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으며, 동국여지승람에는 선대가 곡성(谷城) 사람이라고 전한다. 어느 날 평산을 지날 때 왕건의 명령으로 날아가는 기러기를 맞추었고, 왕건이 기뻐하며 평산 땅을 하사한 것이 계기가 되어 본관을 평산(平山)으로 하였다. 신숭겸은 개국원훈대장군으로 추대되었지만, 고려왕조에서는 후손들에서 큰 인물이 배출되지 않았다. 아마도 신숭겸 장군 무덤의 사격(砂格)이 너무 좋아 천객만래지지(千客萬來之地)이기는 하나 무인의 기상을 간직하기에는 아쉬운 자리이기 때문이다. 평산신씨는 조선조에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세종대에 신개(申槪, 1374-1446, 신숭겸 14세손)가 대제학과 좌의정이 되어 명문가의 기틀을 잡기 시작했다. 그의 증손이 신상으로 이조판서를 지냈고, 고손녀가 율곡 선생의 어머니 신사임당이다.

신숭겸의 무맥유전자가 윤관의 무맥유전자를 만나다

신립 장군 묘역. 무갑산의 남쪽 용맹에 올라서 있다. 선친인 신화국, 신립 장군, 손자 신해의 묘가 상도동 국사봉 아래 선산에 함께 있었으나, 고손자 신완(영의정)이 신립 장군의 묘를 곤지암읍 신대리로 이장하여 조성한 것으로 전해 진다. 무맥 활화산을 터뜨린 신립 장군의 기상으로 평산신씨 가문에서 대한민국 건국훈장을 받은 23명의 무관의 재상들을 배출하였다. 독립운동가는 나라가 임명하지 않았으나 자신의 의지대로 나라를 위해 헌신하였으므로 무관의 재상이라 할만하다.

평산신씨는 신숭겸 장군의 후예답지 않게 600년 동안 문신만을 배출해오다가, 19세손인 신립 장군(1546-1592)에 이르러서야 무인의 유전자가 빛을 발하기 시작한다. 신립 장군은 이조판서 신상의 손자고, 아버지 신화국과 어머니 파평윤씨의 셋째 아들로 무과에 급제(1597)한다. 어머니가 파평윤씨이니 6진을 개척한 윤관 장군의 무인 유전자가 600년 동안 잠자던 신숭겸 장군의 무인 유전자를 만나 새로운 무맥으로 탄생한 것이다. 조선왕조는 문인을 우대하였으므로 명문가의 후손이 무과를 선택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시기적으로 나라의 기강이 약해지면서 변방 오랑캐의 침범이 잦고,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 연이어 일어나자 나라를 구해야하는 절박감에서 평산신씨의 무맥 유전자가 떨쳐 일어난 것으로 생각된다. 신립 장군은 온성부사로 야인(여진) 니탕개(尼蕩介)를 격퇴시켜 두만강 변경을 보전하여 명성이 높았으며 왕실의 신임이 두터웠다. 그 당시 이순신(종9품), 김시민(部將)도 활약했었다. 임진왜란을 당하여 이일(李鎰) 순변사가 상주전투에서 패하자, 선조의 명으로 도순변사都巡邊使가 되어 출병하지만 탄금대 전투에서 왜군에게 패배, 조카 신경지(형 신잡의 아들)와 함께 전사했다. 신립(申砬) 장군이 탄금대 전투에서 패해 전사한 사실로 조선의 왕은 임진왜란의 심각성을 확실하게 인식했다. 조선왕조가 전쟁을 대비하지 않은 탓에 신립 장군은 기껏 80여 명의 군관과 수천 명의 장정들로 15,000명의 정예침략군을 대적했으니 패배는 예상되던 일이었다. 그 후 동생 신할도 임진강 전투에서 전사했다. 신립 장군은 광주시 도척면 곤지암읍 신대리에 신준, 신완과 함께 묻혀 있다.

평산신씨 문중의 전언에 의하면, 신립의 묘는 선친의 묘(신화국의 묘는 1970년에 진천 이월면으로 이장)와 함께 서울 상도동의 선영에 있었다. 영의정 신완의 부친 신여식이 광주부윤으로 광주군에 정착하면서 터전을 마련하였고, 신완(申琓)이 광주 곤지암에 신립 장군과 함께 신준의 묘역을 조성하였다. 신립의 뒤를 이어 세 아들도 무과 출신이다. 맏아들 신경진, 차남 신경유(申景裕)와 막내 신경인은 인조반정 공신으로 병자호란 때에 활약한 장군이다. 조선조에서 무과 출신으로 영의정이 된 인물은 단 두 명인데 신경진과 중종반정 공신 박원종이다. 신립 장군을 기점으로 평산신씨의 무맥(武脈)은 활화산처럼 폭발해 선조-인조대에 70여 명, 효종-경종대에 70여 명, 영정조대에 90여 명, 순조-철종대에 70여 명, 고종-순종대에 190여 명의 무신이 배출되었으며, 임진왜란시에 의병으로 활동한 이가 23명이므로 평산신씨 무맥 유전자의 우수성이 증명되고도 남음이 있다. 이는 조선 초기 174년(1392-1566) 동안 평산신씨의 무과 출신이 16명에 불과한 것을 보면 무맥 활화산의 강도를 짐작하게 한다.

대한민국 민주화의 씨를 뿌린 신익희

해공 신익희 생가. 본채는 T자형이다. 후원에 기념물이 진열되어 있다. 1867년 지어졌고 1992년 경기도기념물 제134호로 지정되었다. 2002년 12월24일 화재로 소실된 것을 2003년 복원했다.

해공 신익희는 한성판윤 신단(申檀)의 다섯째 아들로 태어났다. 칠사산(七士山, 363.7m)의 힘찬 용맥이 동진해 경안천을 만나는 광주군 초월면 서하리에 있는 생가는 11대조인 신립 장군이 잠든 무갑산을 바라보고 있다. 칠사산은 고려가 망하자 조선의 관직을 거부한 한림학사 7명이 숨어 지내던 산으로 충절을 의미한다. 그의 생가는 무맥 유전자에 나라와 민족을 위한 불굴의 의지를 싹틔웠던 장소였다. 해공은 일본 와세다 대학을 졸업한 뒤 귀국해 보성법률상업학교(고려대학교 전신)에서 강의를 했다. 1918년 미국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를 접하고, 3.1운동을 계획하고 지원하며 항일운동을 하던 중 손병희가 체포되자 상해로 망명, 임시정부의 의정의원으로 선출된다.

임시정부의 기초위원으로 이시영, 조소앙과 함께 대한민국 임시헌장과 선포문을 제정한다. 해공은 독립운동을 성공적으로 이끌기 위해서 중국의 협조가 불가피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한중합작 항일운동을 기획하고 호경익(胡景翼)의 추천으로 중국 국민군 중장(中將)이 된다. 그러나 호경익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한중합작 항일운동은 이루어지지 못하지만, 해공의 무인기질을 엿볼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이후 임시정부의 내무부장(현 행안부장관)으로 활동하던 중 해방을 맞는다. 신규희, 신필희, 신정희, 신재희도 구국운동과 독립운동에 참여하고, 그들의 자녀들도 독립운동에 참여한 것은 신익희 가문의 절의와 의기를 보여준 것이다. 해공의 딸 신정완(申貞婉)과 아들 신하균(申河均)도 중국으로 건너와, 신정완은 임시정부 의원으로, 신하균은 광복군 정위로 활동한다.

1. 해공의 유묵‘ 救出民主主義於危機 開拓起死回生 之活路(민주주의의 위기에서 구출하고, 기사회생의 활로를 개척하라)’. 1956년 3월28일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대통령후보로 정식 선출된 후 해공의 대통령 출마변이다.
2. 해공 선친묘의 능선에서 바라본 무갑산의 위용. 생가 앞의 경안천을 건너 무갑산의 기슭에 해공의 선영이 있다. 고조부-증조부-조부-선친-형제 조카들이 묻혀 있다.

신하균은 해공을 이어 3, 5, 6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해공은 해방을 맞아 임시정부의 요원자격으로 군산 비행장을 통해 귀국한다. 미군정하에 어지러운 정세에도 해공은 국민대학을 설립했으며, 정치적으로는 제헌의원으로 제헌국회의장을 지내고, 2-3대 국회의원에 당선된다. 대한민국 건국 초기에는 이승만과 의기투합했으나, 한국동란으로 국난을 당한 시기에 이승만 정권이 사사오입 개헌으로 영구집권을 획책하자 이에 저항, 대한민국 정통야당인 민주당을 창설해 제3대 대통령 후보로 나선다. “못 살겠다 갈아보자” 라는 선거구호를 내세워서 국민들의 여망과 기대를 안고 이승만 대통령의 3차 연임을 저지하는 듯했다. 그러나 하늘이 무심하였던지 그는 유세차 이리로 향하던 기차 안에서 심장마비로 유명을 달리한다. 신립 장군 이후 무갑산과 400년간의 인연으로 큰 인물이 태어났으나 끝내 민주화를 이루지 못한다. 미완의 대기란 바로 해공을 말하는 것이다.

민주주의의 경험이 없던 대한민국이 민주화를 이룩하고 세계 강대국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것은 56년 전에 해공 선생이 뿌려놓은 민주화의 씨앗이 열매를 맺은 것이다. ‘민주당’은 야당 정통성을 상징하는 의미 깊은 당명이다. 해공은 독립운동도 그러했고, 독재에 항거한 민주화 운동도 오직 선견지명으로 나라와 민족에게 희망의 등불이 되고자 선택한 고난의 길이었다. 그의 독립운동 활동이 인정받아 1962년에 영예로운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받았다.

해공 신익희 고택. 서울 중로구 효자동 14-2 (사)해공신익희선생기념사업회 소유. 막다른 골목 안에 자리 잡은 집은 운신의 폭이 좁다는 것을 의미하며, 기운이 갇히게 됨을 의미한다. 해공 선생이 말년에 이 집을 선택한것은 자기의 운명을 직감한 징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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