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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위 팔공산과 무쏘의 뿔과 같은 정기를 지닌 부림홍씨
2019년 12월 05일 (목) 17:46:06 김규순 서울풍수아카데미 원장 www.locationart.co.kr

 

팔공산 마을의 주산으로 마을의 길흉화복의 키를 갖고 있다. 세세대대로 마을사람들은 팔공산에 의지해서 살고 있지만, 홍수 때에는 팔공산 때문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군위군은 경상북도의 중앙에 위치하는 고장이지만, 남쪽에 버티고 있는 팔공산(1,193m)을 중심으로 좌우로 높은 능선을 펼치고 있어서 교통이 그다지 좋은 편은 아니다. 큰 강도 없어서 농촌 고장임에도 너른 들판이 부족하다. 군위군의 위천은 낙동강과는 반대로 남에서 북으로 흐른다. 겨울철의 북풍한설이 위천이 만들어 놓은 통로를 따라 군위군에 들이닥치면 한랭기운이 오래도록 머무는 곳이다.

선비의 올곧은 정신을 담금질하는 장소로는 적당한 곳이지만, 백성이 살기에는 땅이 척박하여 삶이 팍팍한 곳이다. 부계면은 군위군 중에서도 가장 척박한 땅으로 이곳에 자리잡은 부림홍씨(缶林洪氏)의 내공을 살펴본다.

한밤 마을 산수도 남쪽에 팔공산을 두고 좌우 능선(적색선)이 마을을 크게 감싸고 있다. 마을에 좌청룡 우백호는 개천 건너 무정한 모습이고 능선은 북쪽으로 두 팔벌리고 있으니,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남천(청색선)의 물길은 마을의 좌우를 지나가면서 동구 밖에서 합류한다. 팔공산에서 마을까지는 6km에 불과하여 부계면은 경사가 심하여 물살이 급하고 세므로 물의 운반력과 관성력이 강하다. 제주도를 제외하고 한밤 마을에서만 돌담을 볼 수 있는 지질이 형성된 이유다. 마을이 약간 높은 곳에 형성되어 있으므로 현실적으로 큰 홍수를 겪지 않는다. 1930년 경오년 대홍수 때 쑥대밭이 된 후로 루사와 매미 때에도 작은 개천은 범람해도 남천은 넘치지 않았다. ❶물의 침식작용으로 마을 동쪽에는 3~5m가 넘는 깎아지른 절벽❸이 형성되어 있다.

부림홍씨의 뿌리

 

우리나라 홍씨의 조상은 당태종이 고구려에 파견한 학사 여덟 명 중 한 사람인 홍천하(洪天河)로 남양홍씨의 선시조(先始祖)다. 부림홍씨의 시조는 고려 때 재상을 지낸 홍란이다. 부림홍씨는 남양홍씨에서 갈라져 나왔다. 남양홍씨의 족보에 의하면, 홍은열(남양홍씨 시조)의 셋째손자가 홍란(洪鸞)이다. 홍란은 군위군 부계현으로 이주하여 터를 잡고 살면서 본관을 바꾸었다. 부인이 영천이씨이므로 처가댁이 있는 부계로 이주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부계면의 풍수적 분위기를 볼 때 권력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나 유유자적한 생활을 하고자 재상까지 지내면서 살았던 개성과 관향지인 남양(南陽)을 떠나 부계로 들어왔을 것이다. 홍란은 이곳에 살면서 밤하늘이 아름다웠는지 마을을 ‘한밤’이라 부르고 대야(大夜)라 적었다. 낮이나 밝음이 아닌 어두운 밤을 강조한 것은 은둔생활의 극치를 표명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인지 홍란 이후 계대(繼代)가 확실하지 않아 홍좌(洪佐)를 1세조로 하여 족보에 기록하고 있다.

군위군 부계면 한밤마을의 풍수

 

팔공산 북쪽 사면에 자리 잡은 한밤 마을은 부림홍씨의 터전이다. 한밤 마을의 자리는 충적토일 가능성이 높다. 과수원 개간을 위해 땅을 파면 돌이 쏟아져나온다. 적어도 일이천 년 동안에 대홍수에 의해서 팔공산에서 돌과 흙이 떠내려와서 쌓인 것으로 추정된다. 오랜 역사를 지닌 만큼 터전이 어느 정도 안정된 상태다. 1930년 경오 대홍수 때 쑥대밭이 될 정도라고 전해지나 지난 루사(2002)와 매미(2003) 때에도 한밤 마을은 그다지 피해를 보지 않았다.

한밤 마을은 풍수적으로 몇 가지 결함이 있다. 첫째 마을 주산은 있으나 좌청룡 우백호 안산이 없다. 둘째 남쪽에 주산이 있고 북쪽이 열려 있어서 북풍한설에 취약하다. 셋째 팔공산에서 내려오는 물이 반궁수 형태로 마을을 덮치는 형국이다. 남쪽에는 팔공산이 있는데, 1,000m가 넘는 높은 산이라 경사가 급하니 물살도 세다. 따라서 홍수가 나면 상당한 물리력으로 강력한 파괴력을 지니고 있기도 하다.

팔공산 정상에서 발원한 물이 남천(南川)을 이루어 마을 우측을 흐르고, 팔공산 주능선 서쪽 파계봉(991m)에서 발원한 물은 마을 좌측을 흘러서 동구 밖에서 합류한다. 개천 바깥에 있는 능선이 개천의 물을 마을쪽으로 모이도록 가이드 역할을 하므로 오히려 마을로 침범해 들어오도록 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마을 터전은 오랜 시간 충적으로 두툼한 언덕을 형성하고 있어서 수해를 입을 가능성은 낮지만, 팔공산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막을 길이 없다. 소위 마을 자체에 좌청룡 우백호가 없어서 받는 설움이 읽혀진다.

비보풍수의 지혜

 

마을의 북쪽이 열려 있다는 것은 풍수적 방위결함이다. 방위에 따라 지형지물의 형성이 알맞게 배치된 곳을 풍수적으로 좋은 형국이라고 한다. 마을 북쪽에는 산이 버티고 있어야 함이 마땅하지만 한밤 마을은 남쪽에 산이 있다. 그래서 마을 입구에 솔숲정이로 수구막이를 조성하였다. 마을 북쪽에 주산이 없으면 안산(案山)이라도 있어야 하는데 그마저 없다. 솔숲정이로 수구막이와 안산의 역할을 대신하는 비보풍수를 활용하고 있다.

남천고택과 한밤 마을의 북향가옥 군위군 부계면 대율리 768번지에 부림홍씨의 대저택이 남아 있다. 이 집은 250여 년전(1836) 홍귀응(洪龜應)이 아버지 홍우태(洪宇泰·19대)를 위해 세운 집이다. 부림홍씨 남천고택도 한밤 마을의 다른 건물처럼 팔공산을 등지고 북향으로 지어졌다. 팔공산의 신령스러운 기운이 마을을 어루만지고 있으니 이곳 사람들은 포부가 넓고 뜻한 바가 크다. 쉬 움직이지 않으나 한 번 작심한 일은 끝을 봐야 한다. 사람이 간사하지 못하여 난세에 벼슬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부림홍씨 29대 홍석규씨는 “한밤 마을 가옥이 대부분 북향으로 지어진 것은 팔공산의 드센 기를 피하기 위한 것”라고 한다. 북향은 팔공산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피하는 방향이다. 예로부터 바람은 흉을 가져다주는 자연현상으로 파악했다.

양산서원 부림홍씨 가문에서 대대로 인재를 길러낸 교육기관이다. [휘찬려사(彙纂麗史)](경북 도유형문화재 제251호) 목판 831장을 보관하던 곳이었으나 한국국학진흥원에 이관하였다(2012년 4월21일). 홍귀달의 다섯째 아들 홍언국(洪彦國)의 증손이 대사간 홍호(洪鎬·1586-1646)이고, 그의 아들이 경성판관 홍여하(洪汝河·1621-1678)다. 그는 우리나라의 역사서 내용이 혼란스럽다고 생각하여 1639년 고려의 역사를 기록한 [휘찬려사]를 저술했다. 문과 급제 2년 후 효종을 비난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좌천되었으며, 서인과 대립하였다가 송시열의 공격으로 유배되었다.

그렇다고 북풍한설을 막아주지는 못한다. 이쯤 되면 남향집을 짓는 것이 인지상정이지만 마을의 고택들을 보면 북향집이 많다. 이는 집을 지으매 낮은 곳을 뒤로하고 집을 지을 수는 없다는 선비정신의 발로다. ‘정신은 산이 관장한다’는 사상적 바탕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 세파와 고난을 정면 돌파로 이겨내야지 회피하거나 도망가지 않겠다는 부림홍씨 가문의 올곧은 정신를 나타내고 있다. 북향 한옥의 구조특성상 찬 바람을 껴안고 살아야 하는 고충을 마다하지 않고 있는 이유다.

100년 주기의 대홍수가 나면 마을의 좌우를 흐르는 개천물이 마을로 치고 올라올 수 있다. 떠내려온 돌로써 담장을 쌓아 가옥의 좌청룡 우백호로 활용하고 있다. 이것을 이이제이(以夷制夷)라고 할 수 있다. 계곡의 음산한 바람이라도 불면 돌담을 스치는 와중에 음기가 사라질 것이다. 돌을 활용한 비보풍수다.

한밤마을과 돌담 돌담이 논에도 밭에도 과수원과 집에도 축대와 담장으로 쌓여 있다. 가옥에서는 좌청룡 우백호 구실을 하므로 야생동물로부터 가족을 보호하며 홍수 때 산에서 떠내려오는 돌을 돌로써 막아내는 일거양득의 효과를 보고 있다. 마을의 땅을 파면 돌이 지천이다. 50cm 정도의 깊이까지 있는 돌은 죄다 골라서 담장을 쌓았지만 그 밑으로 땅을 파면 돌들이 마구 쏟아져나온다. 오랜 세월 팔공산에서 흙과 돌들이 떠내려와서 쌓인 곳이라는 증거다. 흙에 돌이 많이 섞여 있다면 풍수적으로 좋은 곳은 아니다. 흙이 기운을 품고 있다고 말한다. 오랜 시간공을 들여 돌을 골라내어 옥토로 만들어왔다. 이 모든 노력이 비보풍수다. 비보풍수란 인간의 노력으로 좋은 땅을 만들고자하는 삶의 방법론이다.

삼국유사를 잉태한 인각사 일연 스님이 말년에 기거하면서 삼국유사를 쓴 사찰이다. 옛 모습은 없고 인각사 보각국사탑(보물)과 부도 몇 개, 그리고 석불상이 자리를 지켰으며, 근래에 극락전을 복원 건립했다. 극락전 앞에 세워진 삼층석탑이 바라보는 방향은 좌우 산 사이를 향하고 있다. 풍수적으로 두 산이 앞에 버티고 있으면 산과 산 사이를 택하여 방향으로 삼는다. 642년 의상대사가 건립했다는 인각사에도 풍수지리학이 그대로 적용되고 있다.

흙에 돌이 많이 섞여 있다면 풍수적으로도 좋은 곳이 아니다. 흙이 기운을 품고 있다고 말한다. 흙에서 돌을 골라내어야 하고 버릴 곳도 마련해야 한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것이 돌담이다. 돌담은 마을의 청룡백호는 없지만, 소국적으로 가옥의 좌청룡 우백호를 형성하려는 노력이다. 옛날에도 자연재해는 반복되었을 것임에도 수백 년간 터전을 버리지 않은 것은 팔공산을 바라보며 정신적 유희를 즐길 줄 알았기 때문이 아닌가.

부림홍씨의 고매한 절개를 보여준 인물이 10대 홍귀달(洪貴達)과 네 아들들이다. 홍귀달은 안동 예안 출신인 농암 이현보의 스승으로 영남학맥의 연원으로 재조명 받고 있다. 조선 전기 영남의 대표적인 문장가인 허백정 홍귀달(1438-1504)은 1460년 세조 때 문과로 급제하였다. 연산군 생모 윤비의 폐모에 반대하다가 투옥되기도 했던 그는 대제학과 판서를 거쳐 좌참찬에 이른다. 갑자사화(1504) 때 연산군에게 직간(直諫)하다가 경원으로 유배 도중 사약을 받고 죽었다. 그는 성격이 강직하여 부정한 권력에 굴하지 않았다. “내가 국은을 두터이 입고 이제 늙었으니 죽어도 원통할 것이 없다” 하였다.

홍로의 묘 군위군 산성면 백학리 시현에 있다. 돌혈로 주위형국이 아름답다. 한밤마을을 지킨 부림홍씨 9세 종손이었으며 고려의 충신으로 조선개국년도(1392)에 돌아가셨다.

한밤 마을의 솔숲정이 마을에 있는 숲을 숲정이라고 한다. 소나무 수풀은 솔숲정이다. 때로는 성안숲이라고도 한다. 이런 숲정이는 좌청룡을 대신하기도 하고 우백호를 대신하기도 하며, 안산을 대신하기도 하고 수구막이 역할도 하도록 인공적으로 조성하는 숲이다. 마을 입구에 한밤 마을임을 알리는 조형물이 멋있게 세워져 있다.

홍귀달 부자의 거침없는 정신세계

 

당시 그의 네 아들도 유배를 당했다. 그의 셋째아들 홍언충(洪彦忠)은 이조정랑을 지냈는데 연산군에게 상소하여 간언을 올렸다가 투옥되어 장을 맞고 피투성이가 된 채 진안현으로 귀양을 간다. 유배 중에 중종반정의 소식을 듣는다. 그는 신원회복과 영광의 한양 길을 포기하고 자기를 죽이려던 연산군을 위해 울며 절의를 지켰다.

중종이 벼슬을 내렸으나 고향으로 돌아가 시와 술을 벗 삼아 세월을 보냈다. 동문선에 그의 시가 전한다. 패주에 대한 절개를 지킨 경우는 우리 역사상 단 한 사람뿐일 것이다. 성호사설에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고려가 멸망하자 야은(冶隱)이 있었고, 장릉(莊陵)이 손위(遜位)할 적에 육신(六臣)이 있었으며, 연산이 폐위되자 우암(寓庵) 홍언충(洪彦忠) 같은 이가 있었는데, 모두 그의 마음을 저버리지 않은 사람들이다.’ 맑은 물에 고기가 살지 못한다고 했다. 정신세계에서는 맑은 물이야말로 최고의 경지다. 홍귀달 부자는 죽음을 마다하지 않고 자기가 가야할 길을 무쏘의 뿔처럼 홀로 갔다. 이런 기개와 자존감은 그 누구도 따르기 힘든 경지로 팔공산의 선경에 힘입은 바 크다.

 
글과 사진
김규순(서울풍수아카데미 원장, www.locationart.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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