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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대부들이 선택한 풍수의 땅 용인
2019년 12월 03일 (화) 11:29:50 김규순 서울풍수아카데미 원장 www.locationart.co.kr

 : 김규순의 풍수이야기

 

 

 

정몽주 묘와 이석형의 묘 이석형의 묘가 정몽주 묘 옆에 있다. 그는 연안이씨로 배우자가 정몽주의 증손녀였다. 이석형은 세조의 총애를 입어 한성부판윤에 7년간 봉직했다. 그의 현손 이정구와 이명한, 이일상 3대가 대제학을 지냈으므로 이석형의 묘가 길지로 유명해졌다. 연안이씨는 당나라장수 소정방의 부장副將으로 백제를 평정하러 왔다가 신라에 귀화한 이무李茂의 후손이다. 정승 8명, 대제학 명 문과급제자 250명을 배출한 명문가이다.

용인의 자연환경

 

이주국 고택 원삼면 문촌리 문수봉 남쪽 기슭에는 이주국장군의 고택과 묘지가 있다. 이주국李柱國은 정종의 후손으로 정조의 신임을 받아 형조판서와 훈련대장을 역임했다. 그는 이곳에 살다가 이곳에 묻힌 용인사람이었다. 이 집을 150년전에 구입한 장관해鄭觀海는 용인에서 활동한 유학자로 일기(관란재일기)를 작성하여 일제강점기의 피폐한 농촌의 생활상을 기록하였다. 지금은 정관해의 증손자가 살고 있다.

용인은 경기지방의 핵이다. 한남정맥과 한강유역과 안성천 유역을 동시에 품고 있는 지역이다. 한남정맥이 척추처럼 용인의 한가운데를 달리면서 북동지역과 남서지역으로 나누고 있으며 북동지역은 한강유역이고, 남서지역은 안성천유역이다. 한남정맥의 용인구간은 칠현산에서 광교산까지 400미터정도의 낮은 산지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 특징이다. 한강 수계를 보면 경안천과 북하천 그리고 청미천이 용인에서 발원하는데 모두 한강으로 유입된다. 안성천 수계는 기흥저수지의 오산천과 이동저수지의 진위천, 안성천의 상류인 원삼면으로 구성된다. 한강수계의 마을은 개천을 따라 북풍이 들이닥치므로 바람이 세고 겨울에 춥다. 안성천수계의 마을은 한남정맥이 북풍을 막아주고 남향으로 마을이 따뜻하여 은거하기 좋은 지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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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곡재南谷齋양지면 주북리에는 남곡재가 있다. 영천이씨 이석지李釋之는 대제학을 지낸 인물로 고려가 망하자 용인 남곡에 은거한 두문72현의 한 사람이다.

이백지의 묘용인을 본향으로 한 세거성씨는 용인이씨와 추계추씨이다. 용인에서 용인이씨의 위세는대단하다. 특히 중시조인 이백지의 묘는 호암미술관 뒤에 위치하고 있다. 삼성이 에버랜드를 만들기 위해 용인의 땅을 사들일 때 용인이씨문중 땅이 많았다. 이 때 땅을 판 돈을 분배했는데, 이백지의 후손은 심지어 한 살짜리 꼬마까지 일인당 2억씩 받았다는 후문이다. 이백지의 후손들에게 이곳은 대명당으로 성지화되어 있다.

물이 여섯 갈래로 나누어지고 있다는 것은 한남정맥 좌우로 능선이 여러 갈래로 분기되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서로 다른 물을 마시고 산다는 것은 서로 다른 생각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을 다양성이라고 하는데, 다양성은 새로운 아이디어를 창출하므로 문화 창달에 큰 장점이 될 수 있다. 전통시대에는 물을 통하여 사람을 만났다. 강을 따라 육상도로가 발전하였고, 선박을 운행하여 강물은 대량 운송수단의 통로로 활용되었다. 강을 통해서 상류의 사람과 하류의 사람은 서로 만나서 물물교환을 하고 정보를 나누기도 하면서 소통을 할 수 있었지만, 산으로 막혀 있으면 지도상 바로 옆 동네라도 교통이 쉽지 않아 만남의 횟수도 드물었다. 지리적인 장애요인을 물이 다르다고 표현하며, 교통의 장애가 있으면 소통의 기회가 부족하므로 단합하기가 쉽지 않다는 풍수적 견해가 생겨난 것이다.

송병준의 별서지 친일민족반역자 거두 송병준宋秉畯의 별서지가 양지면 추계리에 있다. 그의 99칸 대저택이 지금은 헐리고 없어지고 교회가 들어서 있다. 이곳에 별서를 지은 것은 한 때 양지현감을 지낸 것이 인연이 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이완용 내각에서 농상공부대신과 내부대신을 지냈다. 한일합방후 자작이되고 1920년 백작으로 승급한다. 조선총독부 [조선공로자명감]에 353명중 한사람으로 수록된다. 아들 송종헌은 부친의 작위를 습작했다. 은진송씨로 조선 유학의 거두 송시열의 9대손이다.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조사위원회는 송병준과 송종헌의 재산을 국가로 환수하기로 결정했다(2007년 5월2일).

사람이 살만한 곳의 네 가지 요소인 지리地理, 생리生利, 인심人心, 산수山水 중에서 용인이 가지지 않은 요소가 있겠는가. 지리地理란 땅의 형세를 보는 것이다. 마을의 수구水口가 닫혀 있고 그 안에 들이 펼쳐져 있는 곳이 상급이다. 또한 마을의 뒷산이 높고 수려하고 단정하며 청명해야 좋은 곳이다. 산은 사람의 성정性情을 관장하므로 산의 모양을 보지 않을 수 없다. 들판과 물은 재물을 생산하는 곳이므로 마을 앞에 들판을 갖춘 곳이어야 자손이 대대로 살 수 있다. 용인의 곳곳에 이러한 곳이 종종 눈에 뜨인다.

사대부들의 마을

 

용인 미평리 약사여래입상 경기도와 충청도 곳곳에 미륵불이 산재해 있다. 조상들은 큰 바위에서 기우제를 지내는 용龍신앙이 있었는데 이를 미르신앙이라고 한다. 미르는 용의 우리말이다. 미르바위에 부처를 새겨 미륵바위 또는 미륵불이라고 불렀다. 미평리약사여래입상도 새겨진 부처는 약사여래불이지만이곳 사람들은 미륵불로 불렀던 이유이다.

‘살아 진천, 죽어 용인’이라는 말대로 용인 땅에는 속속들이 묘지가 들어 서 있다. 그만큼 사람들이 오랫동안 세거지로 삼아왔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조선시대에는 지리적으로 한양에서 가까운 관계로 고관대작들의 별업지가 되었고, 벼슬에서 물러난 사대부들이 낙향하지 않고 머물러 사는 동네가 되었다. 고려의 개성이나 조선의 한양에서 벼슬을 하면서 오래 살았던 사대부들은 고향으로 돌아갈 근거마저 잃어버린 경우가 있다. 이럴 경우 외가나 처가 동네에 몸을 의탁하는 경우가 많았다. 지금 그들이 살았던 가옥은 사라지고 그들의 유골이 묻힌 묘지가 전하고 있다. 우리 주위에는 고려시대의 묘지는 찾아보기 어렵고 주로 조선시대의 묘지가 많다. 이는 조선시대부터 가문을 중심으로 조상묘지의 중요성이 강조되었음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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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김씨 익재공파성지익재 이제현과 둘째 아들 이달존의 단을 모셔 놓은 곳. 원래는 이제현의 증손자 이신의 묘역이지만, 익재공의 묘가 북한에 있어서 이곳에 단을 설치하여 향사를 모시고 있다.

한산이씨음애공파 고택기흥구 지곡동에는 한산이씨 음애공파 고택이 있다. 한산이씨의 중시조 이곡과 아들 이색은 이제현의 문인으로 당대의 석학이었다. 목은 이색은 공민왕 때 문하시중에 이르렀고 권근·변계량을 제자로 두어 조선 성리학의 근간을 이루었다. 그는 조선에 입조하라는 이성계의 회유를 거절한 탓에 이방원에 의해 피살되었다. 토정 이지함을 비롯해 사육신 이개, 이산해를 비롯한 정승 6명 대제학2명 문과급제자 195명을 배출한 명문가이다.

백암면 근삼리에는 경주이씨 익재공성지 慶州李氏 益齋公聖地가 있다. 이곳에는 고려시대 거유였던 익재 이제현李齊賢과 둘째아들 이달존(백이정의 사위)의 단이 모셔져있다. 두 분의 묘지가 북한에 있어서 제사를 모시기 위한 방편으로 이곳에 설단했다. 이곳은 이신李伸(이달존의 손자)의 묘역이다. 이신은 조선 태종 때에 제주도안무사를 역임했는데, 용인에 묘역을 조성했다는 것은 고려를 넘어 조선의 명문가로써 새로운 입지를 구축한 것으로 보인다. 이신의 증손자 이공린의 묘역도 있는데 팔별八鼈집으로 유명하다. 이공린은 박팽년의 사위가 되었는데, 혼례 첫날밤에 용왕이 꿈에 나타나서 자신의 여덟 아들을 구해달라고 간청했다. 잠을 깨어 신부에게 물어보니 장모가 사위에게 먹이려고 자라 8마리를 구해서 놓았다고 했다. 그는 부인과 자라 8마리를 꺼내서 호수에 방생하였다. 그 후 여덟 아들을 두었는데, 자라와 물고기라는 의미를 붙여서 오, 구, 원, 타, 별, 벽, 경, 곤이라 불렀다. 경주이씨 족보에서 그들의 이름이 사실임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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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구만의 묘숙종 때 대제학과 영의정에 올랐다. 강릉에 유배되었을 때 지은 작품이 유명하다. “동창이 밝았는냐 노고지리 우지진다 / 소를 칠 아이는 여태 아니 일어났느냐 / 재 너머 사래 긴 밭을 언제 갈려 하노니”

남구만의 별서지

모현면 갈담리에는 남구만(15대)이 노후를 보냈던 별서지가 경안천가에 있다. 별서지에서 1 키로 정도 떨어진 초부리의 둔봉산에는 그의 묘가 있다. 처음에는 남재(5대)의 묘가 있는 별내면 화접리에 묻혔다가 후손에 의해 이곳으로 이장됐다. 의령 남씨 남재와 남은 형제는 조선개국 1등공신이다. 그 후손으로 남이장군(9대)과 생육신 남효온(10대)을 배출했으며 정승과 대제학을 각각 6명씩, 문과급제자 140명을 배출한 명문가이다. 의령 남씨가 남양주 별내, 성남에 별업지와 묘지가 분포하는데 남구만은 경안천을 따라 용인에 터전을 마련했다.

채제공蔡濟恭(1720-1799)의 묘 정조 시대를 대표하는 정승이다. 영조에게 목숨을 걸고 사도세자의 사사를 반대한 사람이다. 영조는 정조에게 “참으로 채제공은 나의 사심없는 신하이자 너의 충신”이라고 평한 인물이다. 정조는 정승으로 발탁하였고 그는 정조의 후원으로 개혁적인 업적을 쌓았으며 50년간의 관직을 수행했다.

모현면 능원리에 정몽주의 묘가 있다. 개성의 선죽교에서 피살되고 아들 종성의 처가(죽산박씨)의 마을에 묻혔다. 그는 연일정씨로 고려 말 충신으로 조선조의 충신모델이 되었다. 그 당시에 죽으면 아무리 멀어도 고향에 묻히는 것이 관례였으나, 지방 민심이반에 대비한 정치적인 이유와 오랜 개성생활로 지방에 근거지를 마련하기가 쉽지 않은 탓으로 모현면 능원리에 묻혔을 것이다. 묘지부근에 종가가 있었으나 사십년 전에 건물은 철거되었고 지금은 다른 사람이 살고 있다.

한양 견지동에서 태어난 여흥 민씨 민영환은 흥선대원군의 처조카이면서 명성황후 민씨의 친정조카로 그야말로 금수저를 물고 태어났다. 그는 예조, 병조, 형조, 내무판서를 역임하였으며, 1896년 러시아황제 니콜라이2세의 대관식에 참석하러 가면서 세계 일주를 하였다. 1897년에는 영국 빅토리아 여왕 즉위 60년 축하식에 참가하면서 유럽을 여행하면서 선진문물을 보고 부국강병의 의미를 깨달았다. 그러나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자유독립의 초석이 되고자 자결하여 순국했다. 기흥구 마북동에 있는 그의 묘는 아파트촌 둘러싸여 있다. 한말 순국지사로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여흥 민씨는 태종 이방원의 처에서부터 조선말 고종의 명성왕후까지 이어지는 명문벌족이다.

수지구 상현리에 조광조 선생의 묘와 심곡서원이 있다. 그가 태어난 곳은 한양 낙원동이다. 한양 조씨는 조선개국 공신으로 조상대대로 한양에 터를 잡고 살았다. 이곳의 묘역은 선산이며 별업지였다. 별업지란 머리를 식히거나 힐링을 위한 세컨드하우스 개념이다. 조광조 묘역의 좌측능선에는 증조부, 조부, 부모의 묘가 나란히 조성되어 있다. 조광조는 기묘사화를 기화로 화순군 능주에서 사약을 받고 죽었으며 시신으로 돌아왔다. 그의 도학정치는 대부분 선비들의 지지를 받았으나 현실정치를 살피지 못한 점이 있어 간신의 역공에 걸려 실패하고 말았다는 것이 율곡의 평이다. 그는 조선 유교역사에 기록된 태두로 존경을 받고 있다.

주택지 개발 현장 용인을 돌아다니다보면 주택지 개발현장을 자주 만나게 된다. 지금은 죽어서 용인이라기보다는 살아서 용인이다.

용인 곳곳에 명현들의 숨결이 숨어 있고 또 그들의 묘지가 남아 있다. 이들 외에도 뛰어나진 못했으나 사대부 가문으로 자부심을 갖고 살아온 후손들이 마을마다 한자리씩 차지하고 있다. 용인에 풍수적 길지가 숨겨져 있다는 속설에 따라 삼성그룹 이병철 회장은 생전에 풍수사 지창룡에게 부탁하여 에버랜드 내에 자신의 신후지지를 점지하여 삼성그룹의 영원한 번창을 기원했고, 김대중 대통령은 손석우에게 요청하여 부모의 묘를 이동면 묘봉리에 이장하여 대통령에 당선되는 후광을 입었다. 이순자(전두환 대통령의 처)도 손석우에게 부탁하여 영부인이 되는 명당을 찾아 친정 조부묘를 망우리에서 양지면 추계리로 이장했다는 후문이다. 레이크사이드CC의 창업자 윤익성은 골프장 내에 무덤을 만들었으나 사후에 자식들의 재산분배다툼으로 1조원에 달하던 골프장을 3,500억원에 삼성에 넘기는 불운을 겪기도 했다.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내노라하는 분들도 풍수에서 말하는 길지를 찾아 선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도학적 현실주의에 근거한다. 풍수는 천당이나 극락을 말하지 않는다. ‘지금 여기서’ 잘 먹고 잘 살고자 하는 믿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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